나눔의글
내용
(( 3 )) 인간의 미래
*프로이드 : 인간은 누구나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
*아인쉬타인 : 인간의 미래는 마음에 있다,
*최재왕 : 인간은 지혜를 증득하면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고 우울증과 치매까지 예방된다,
( 쇼팬하우어 )
모든 진리는 세 단계를 거친다.
All truth passes through three stages. First, it is ridiculed. Second, it is violently opposed. Third, it is accepted as being self-evident - 모든 진리는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 조롱당하고, 두 번째 심한 반대에 부딪히고, 세 번째 자명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1)
이 글은 세계 최초로 주장하고 있다, 이 글의 설득력과 신뢰를 위하여 약간의 세계시와 기사, 인터넷 내용을 참고한다, 나는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을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으로 설명하였다, 내가 제시한 방법을 활용하면-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부터 증득하는 결과까지 혼자서 검증하며 나아갈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지혜를 증득해서 현명하고 자유로우며 무한하게 사고해야 한다, 또한 극단의 고통과 부작용을 야기하는 우울증과 치매까지 예방해야 한다,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면 깊은 잠에 빠질수가 없고 진정한 행복을 알수도 없으며 마음의 안식처로 들어 갈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불균형적이고 불완전하며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 글은 지혜의 시작이자 끝이며 처음이자 마지막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시간이 날때마다 헤아려서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기 바란다, 이 글로 지혜를 증득한 자는 자신들이 겪은 경험을 각자의 개성과 방법으로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혜를 증득한 자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왜냐하면 지혜를 증득한다는 것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 즉 인간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글을 통하여 지혜를 증득하면- 세계의 시인들과 철학자, 4대 성인이라는 붓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의 정신 세계를 그냥- 알게 된다, 이 글 하나로 그들의 내면과 가치를 모조리 알게 되는 것이다,
2)
붓다의 시와 게오르게의 시ㅡ
이 시는 불교의 창시자 붓다의 시와 독일의 시인 게오르게의 시이다, 이 시들은 외부의 현상이나 남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나타나는 생각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단지 생각을 하고 느낄뿐 그것을 볼수가 없기에 습관의 타성에 끌려 다닌다, 더구나 생각이란 추상적 이미지로 난해하기 그지없는 성질이기에 그것의 주인인 자신조차 마음대로 다룰수가 없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인간은 지혜를 증득하면 이른바 "마음의 눈"이라는 지혜가 생기고 그것이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한다, 즉 지혜가 통찰과 직관을 장착하고 타성을 헤아리며 현명함을 조절하는 것, 1)은 지혜를 증득한 붓다가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인식의 본질을 표현하였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다 보면 무한하고 자유로우며 영원한 지혜를 증득한다는 역설적인 설명이다, 2)의 시는 지혜를 증득한 게오르게가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인식의 본질을 표현하였다, 언제나 상냥한 아침처럼 싱그럽고 청정하며 자유로운 생각을 너라고 표현한 것, 1)과 2) 는 감정에 차이가 있지만 언어의 표현은 선택 사양일 뿐이다, 1) 은 붓다가 감정을 배제시킨 것이며 2)는 게오르게가 감정을 포함시킨 것, 지혜를 증득하면 인식은 평화롭고 향기가 나는 법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간단 명확하다. 첫번째, 붓다와 게오르게처럼 지혜의 정신 세계가 있다는 것! 두번째, 그러한 정신 세계로 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 세번째, 그러한 정신 세계로 가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3)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ㅡ 석가모니 붓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너는 날렵하고 청순하여 ㅡ 게오르게 시인
너는 날렵하고 청순하여 불꽃 같고
너는 상냥하고 밝아서 아침 같고
너는 고고한 나무의 꽃 가지 같고
너는 조용히 솟는 깨끗한 샘물 같다.
양지바른 들판으로 나를 따르고
저녁놀 진 안개에 나를 잠기게 하며
그늘 속에 내 앞을 비추어 주는
너는 차가운 바람, 너는 뜨거운 입김
너는 내 소원이며 내 추억이니
숨결마다 나는 너를 호흡하며
숨을 들이쉴 때마다 너를 들이 마시면서
나는 네게 입맞춤한다.
너는 고고한 나무의 꽃 가지
너는 조용히 솟는 깨끗한 샘물
너는 날렵하고 청순한 불꽃
너는 상냥하고 밝은 아침.
글쓴이 최재왕, 상업용 금지,
이 글은 요즈음 정신 문화적으로 유행하는 웰빙이나 휠링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와 오류를 스스로 발견하는 동시에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는 원리와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부분중 치매에 대한 의미는 오해를 불러 올수도 있기에 다시금 간단 명확하게 설명을 한다, 내가 이글에서 말하는 치매는 정신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육체적으로 발생하는 소위 혈관성 치매나 알츠하이머 치매라는 기타 병명은 단지 육체적 불구로 구분될 뿐이다, 따라서 육제적인 문제는 정신의 문제보다 하위 개념으로 육체는 정신을 넘어 설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설명한 것이다,
*참고ㅡ
美 치매 대란 경고… 한국도 2050년에는 237만명
[2050년 한국 치매노인, 현재 대구광역시 인구에 육박할 듯]
美, 2050년에 1380만명 예상 "치료·관리 비용만 2조 달러"… 한국은 노인 13% 치매 앓을듯- 미국의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치매)는 현재의 확산 속도로 볼 때 2050년이면 대유행(epidemic)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미 정부 지원 연구기관이 경고했다. 우리나라도 2050년에 치매 노인이 전체 노인의 13.2%인 237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치매 대란(大亂)이 예고돼 있다.
*
"미 노년층 1/3, 치매로 사망"
미국 노인의 ⅓이 알츠하이머나 기타 다른 치매 질환으로 인해 사망한다고 미국 알츠하이머 협회가 19일 발표했다. AFP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협회 회장 해리 존스는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살아남는 사람은 없다. 알츠하이머 병 자체로 인해 죽거나 다른 질환들과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죽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 미국 노인의 ⅓이 이 질환으로 사망한다.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지만 현재 치료방법이 없다"고 덧붙였다. 알츠하이머 협회는 환자를 장기적으로 치료하는데 드는 비용이 2013년 약 200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밝히며 시급히 질병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2050년에는 치료비용이 12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서울=뉴스1) 기타기사참조2013.03.20
주의ㅡ
한국의 정부나 의학계가 어떻게 치매를 알고 있을까? 이들의 치매에 대한 정보는 유전이나 가족력, 먹는 음식이 어떻다? 또는 과음이나 흡연? 불규칙한 생활 습관? 등으로 치매에 걸린다는 설명 뿐이다, 이들의 주장이란 소위 혈관성 치매나 알츠하이머 치매 등 육체적 불구에 대한 설명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을 보다 이해하고 가름하여 본다면 그러한 주장들은 정신적인 치매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간파할 것이다,
*
드디어 내 글의 가치와 진정성을 보증하는 기사가 나왔다,
[서울= 연합뉴스 2008.02.25 09:44] 한성간 기자
우울증은 인류의 삶에 도움 되는 방어기전-
질병으로만 보고 약으로 치료하려만 해서는 안돼!
우울증은 일종의 방어기전으로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론이 나왔다.
영국 정신의학연구소의 폴 키드웰 박사는 논란이 일고 있는 저서 `슬픔의 생존법(How Sadness Survived)에서 우울증을 고통스러운 현대의 질병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삶에 필요하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 속에서도 수천년을 인류와 함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방어기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이 24일 인터넷 판으로 보도했다. 키드웰 박사는 우울증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통찰을 부여해 삶의 어려움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다.
우울증은 심한 경우 무섭고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단기적인 고통으로 끝나며 여기서 헤어 나오면 스스로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키드웰 박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창의력까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하고 그 증거로 우울증으로 어두운 시련을 겪었던 존 스튜어트 밀, 윈스턴 처칠,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례를 들었다. 결국 우울증은 장기적으로 볼 때 인류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키드웰 박사의 이러한 이론은 우울증과 슬픔에 대한 현대사회의 태도에 의문을 갖는 학자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나왔다.
이들은 의사와 제약회사들이 질병의 진단에만 지나치게 치우쳐 우울증을 질병으로 간주하고 값비싸고 해가 될 수도 있는 약으로 이를 치료하려 한다는 비판적 입장을 보인다. 작년 미국의 일부 학자들은 의사와 제약 산업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감정인 슬픔을 질병으로 바꾸려하고 있다고 경고한 일이 있다. 슬픔의 상실이라는 책을 함께 쓴 럿거스 대학의 앨런 호로위츠 교수와 뉴욕 대학의 제롬 웨이크필드 교수는 슬픔이 정상적인 감정이며 건강과 웰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서 의료계에 대해 이를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두 교수는 슬픔이 인류와 함께 하고 있는 데는 진화론적으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슬픔을 약으로 없애려 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울증은 20명에 한 명꼴로 나타나고 있으며 4명 중 1명은 평생 중 그 어느 때에 우울증을 겪게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 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을 기도하거나 자해한 수는 2100명으로, 2002년(350명)의 6배로 증가했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지난해 항우울제를 생산하는 제약사들에 "항우울제는 자살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경고 문구의 부착을 확대하도록 요구했다.
조지프 글렌멀런(Glenmullen) 하버드의대 심리학과 교수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항우울제를 먹은 뒤 자살을 기도하는 미군 병사들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심각한 우려를 불러 일으킨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기사참조 2008.06.06
참고ㅡ
선진국 영국의 정신과학 연구진이 우울증은 자기보호 기전의 일종이라는 연구조사를 발표하였다, 우울증이 일종의 방어기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우울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보호 본능적 반응이라는 내용이다, 기사는 세계 최초로 우울증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전망이다, 우울증은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서 효과도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의 기사는 항우울제와 같은 약물이 신경 조직과 세포에 부작용이 많고 안좋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동시에 우울증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획기적이고 창조적인 도구로 활용할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기사는 내가 우울증의 경험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혜로운 방법을 주장하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울중이라는 마음의 병은 생각하는 방법으로 고쳐야 심신에 가장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을 형성하는 뇌의 건강은 그대로 육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위의 기사는 내가 정신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보게 되었다, 이들이 인터넷의 내 글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니겠지만- 의학의 본고장 영국에서 정신 과학적으로 주장하는 기사라 보다 신뢰가 가고 더욱 마음이 뿌듯하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가 우울증을 도구로 보다 쉽고 빠르며 현명하게 극복하는 방법만 알고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정신질환이라는 의학상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보다 새롭고 휙기적이며 독창적으로 높아질수 있는 정신적 차원의 계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울증과 치매에 대한 잘못된 역사는 나와 같은 자나 선진국의 정신과학 연구자로부터 보다 자세하고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위의 기사는 나의 경험과 혜안으로 대환영 받을만 한 것이다,
4)
오래전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연결되고 우울증이 치매로 어어진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때까지 나는 그러한 현상에 대하여 정신과학적 현상이나 의학적 기사를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었다, 단지 시적 사고관에서 나오는 통찰과 지혜를 정신적인 문제와 연관시키고 내면의 세계를 보다 심층적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 확신을 가진 것이다, 물론 내가 그것을 주장 할때는 나의 이름도 공개하여 내 글에 대한 신뢰와 책임을 함께 걸었다, 요즘에 들어 선진국을 대표하는 정신과학과 의학 연구진들이 발표하는 기사와 내용들을 살펴 보니 나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 혼자 수년을 앞서 간 것이다,
참고ㅡ
내 지능( I,Q )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초등학교 지능 검사는 65 정도로 기억한다, 시험은 문제의 내용이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려 90% 는 못 풀었다, 어떤 학생은 110 정도가 나와서 비교하며 자랑하였지만 나는 그것을 숨겼던 기억이 있다, 나는 40대에 지혜를 증득하였다, 나이를 먹었다고 지능이 높아지는 경우는 결코 없다, 지금도 나는 지식을 습득하는데 남들보다 어려움을 겪는다, 지식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어 더러는 핀잔을 받기도 한다, 지능은 어릴때 형성되는 것으로 어른이 되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는 성질이 다르다, 나이와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글은 지혜를 증득한 자의 글이다,
2010년 7월 14일- 초등학교 생할기록표 확인 ,
[ 성적기록표 = 수,우,미,양,가,ㅡ 5단계로 표현 ]
[ 5학년- 가,가,양,가,미,가,가,가,가 ]
[ 6학년- 가,가,양,양,가,가,가,가,가,]
[ 특기사항 및 지도사항란-]
성격이 약한편이며 남에게 의지하려고 함,
끈기있게 행동하나 둔한 편이다,
책임감이 희박하다,
급우간에 친밀감을 갖기 힘들며 고립적이다,
고집이 센편이며 학교 생활에 취미를 못 붙이고 있는 경향임...
애초부터 나는 지능이 너무 낮아 지식을 배우는게 어려웠다, 그렇다고 다른 재능이나 적성, 취미도 없었다, 단지 생각하는 기능이 정지되어 백치와 같은 현상만 나타났다, 조금만 생각을 해도 그것이 멈추고 정신이 하얗게 되면서 머리가 아팠다, 말을 이해하기 힘들고 생각을 할 줄 모르니 무지와 혼란, 무기력의 현상만 나타났다, 선생님이 성적표 맨밑에 지적한 부분은 "내가 무엇을 알거나 고집이 있어서 그렇게 한 부분이 아니라?" 내가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어쩔 줄 몰라서 그대로 있거나" 하던 부분을 오해하고 설명한 것이다,
국가적 과제ㅡ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는 육체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정신 건강과 발전에 관한 내용은 우리와 가까운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들은 정신의 문제를 구체적이고 심층적으로 간파하고 서로 연구하고 협력하면서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국제적 공감대를 이루기도 하였다, 정신적 문제의 부작용과 후유증은 사전에 점검하고 천문학적인 비용의 낭비를 막는 예방이- 가장 선도적 차원이라는 선택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같은 삶의 경향은 누구나 같은 문제로 존재하기에 개인은 물론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적 가치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선진국에서 인간의 정신 발전을 위한 방법 중 가장 좋은 예) 의 하나로 채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5)
주의하자ㅡ
이 땅에는 단지 잔머리와 말장난으로 타인에게 사기를 치거나 획책하는 정신분야 지도자가 넘치고 있다, 이들 중 더러는 종교지도자, 정신과를 비롯한 의학계, 혼자만 똑똑한 지식인, 등으로 보다 약하고 허술한 개인의 정신적 문제를 파고 들면서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 이러한 정신문화 현상은 후진국에서 나타나는 불량한 행태와 닮았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 이것은 한국의 정신문화가 우후죽순처럼 ?아나는 불량한 문제들을 냉철하고 심도있게 가려낼 만큼 성숙하지 못한 반증이다, 요즈음 각종 케이블 방송과 매스미디어가 웰빙이나 휠링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명확한 내용이나 이해를 간과한채 여과없이 방송하는 것을 자주 본다, 나는 그처럼 단체나 무리를 지어 하는 명상이나 기체조, 뇌호흡, 마음수련 등이, 혼자서 공원에 앉아 있거나 혼자서 조용하게 사색하거나 혼자서 가까운 실개천을 산책하는 효과보다 질이 떨어 진다고 판단한다, 또한 남의 미래에 공짜 복을 퍼주는 사주나 역학, 관상, 운명, 점, 타루, 등의 왜곡된 정신문화 현상도 우려스럽게 판단한다, 그것들은 공짜와 같은 행운이나 요행 따위를 호도하고 조장하는 행위로 과대포장에 다름 아니다. 우리 주변에 그러한 정신문화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에 각자 주의를 당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신문화가 구체적이고 합리적이며 철학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6)
세상에 공짜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한국의 정신분야 전문가란 자들은 지능적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있다, 그런 말과 행태란 우리가 마음의 중심을 잃어 버렸을때 무리에 들어가야 편하게 느끼는 것처럼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산으로 올라가면 마음이 열리는 듯 하지만 내려 오면 현실의 문제와 직면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의 문제를 외부에서 해소하려는 발상은 우리의 눈과 귀만 어지럽게 될 뿐이다, 내안의 문제에 대한 대응 능력을 스스로 키우는 것보다 현명한 것은 없다,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를 스스로 검증하거나 확인할수가 없다면, 그것은 가족이나 후세에게도 물려 주지 말아야 한다, 일시적 만족을 유도하는 긍정주의나 낙관주의도 비현실적이고 제한적이다, 오죽하면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 조차 자신의 주장은 잘못 되었다고 양심고백을 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가와 종교가들이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을 차용해서 써 먹었지만 결국 막을 내린 것이다, 구체적인 설득력도 없고 객관적 대안도 못되는 그것은 창시자인 마틴 셀라그만 조차 검증을 할수 없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가능한 영역에서 목표를 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과학적이다, 공짜와 같은 기적을 바랄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만큼 이루어 지는 공평한 것을 추구하자!" 우리가 가야 하는 목표는 바로 그곳ㅡ 지혜의 경지이다,
7)
핵심ㅡ
이 글은 지혜에 관한 내용이다, 지식의 상위 개념이 지혜이다, 지식은 배워서 알듯이 지혜도 배워야 한다, 실로 알수가 있다면 지혜는 공평하다, 단 한치의 공짜가 없다, 누구라도 시도하고 노력하면 지혜를 증득한다, 그렇다고 지혜와 관련된다는 한국의 시인이나 철학자, 종교지도자를 찾는다고 함부로 나서지 말아라- 언제나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므로 지혜의 본질과 핵심을 벗어나게 만든다, 따라서 그대가 이 글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먼저 이것부터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지혜라고 하는 표현은? 그대가 아는 지식으로 지혜를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은 모두 접어 두어야 한다, 먼저 그것을 인정해야 진도가 나아갈수 있다, 한 예)로 불교에서 고승이 제자에게 "오직 모를뿐! "이란 말로 깨달음의 시작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적 의미와 가치는 모두 접어 선반 위에 두어라! 그대는 인식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지혜를 설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지혜란? 새로운 생각으로 인식을 자각하고 새로운 변화를 체득하면서 새롭게 얻게 되는 앎의 현상을 지혜의 시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즉ㅡ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지혜의 시작이다,
주의 : 이 글에서 해탈의 경지라는 표현은 지혜의 경지를 나타내는 동의어,
지혜란 무엇인가?
(1)
사실 나는 지혜가 무엇인지? 어떻게 지혜를 체득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40대 초반에 우연히 세계시( 한국어 번역 )를 통하여 지혜를 증득하였다, 그것을 시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끝임없는 인내와 용기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몇번의 갈등과 선택을 넘어 지혜의 산 정상에 서 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누구라도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글이 완성되면 가장 쉽고 빠르며 편리한 방법으로 지혜를 증득할수 있다, 세계처럼 열린 마음과 위대한 사고방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수 있다, 내가 이글을 쓰면서 겸손을 부리거나 거만을 떤다고 보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것도 함께 나누고 발전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한그루 나무를 심는 자ㅡ아주 천천히! 느긋하게ㅡ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이 글에 손을 내 밀어 무르익은 열매를 따 먹기까지! 삶의 길에는 희로애락과 생노병사에 놓이고, 허물을 벗지 못한 인식은 정신적 물질적 시간적 손실이 따라 온다, 세월이 갈수록 의지는 약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휘둘리니, 아무리 돈 많은 부자에 권력이 있고 명성이 높아도 소용이 없다, 스트레스는 쌓이고 우울증을 낳으며 치매를 부르니-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글은 스트레스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자, 자신이 부족하거나 큰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자,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는 자, 우울증과 치매에서 해방되고 싶은 자, 종교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생기지 않은 자, 삶과 죽음의 문제를 명확하게 알기 바라는 자, 삶에 대한 회의로 끝없이 절망하고 있거나 그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자에게 필요한 내용이다,
그 밖에 인문학의 핵심인 시와 철학, 예술, 의학( 정신과 ) 종교 등에서 이같은 지식을 다루기 전에 반드시 읽어 보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이 글은 인간의 핵심적 가치인 지혜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 에밀리 디킨슨-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ㅡ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 ㅡ
의식처럼 찾아 오는 느낌 ㅡ
마치 무덤처럼 신경은 엄숙히 가라않고 ㅡ
얼어버린 심장은 질문하네,
바로 그였느냐고, 고통했던 이가,
어제, 아니 수세기 전부터?
발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네ㅡ
땅 위건, 공중이건, 아니 허무속이건 ㅡ
멋대로 자란 숲길,
수정처럼 명징한 쾌감ㅡ
이것이 선각자의 시간ㅡ
기억해야 하리, 끝내 살았다면,
냉동되는 인간이 눈을 상기하듯ㅡ
처음에ㅡ 오한이 나다가ㅡ이윽고 황홀ㅡ
이윽고 해방이 오는 것을,
참고ㅡ
에밀리 디킨슨은 세계적인 미국의 여류시인이다, 에밀리 디킨슨이 쓴 시들은 대부분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시는 한국의 시인들, 또는 시문학에 박학다식한 대학교수라고 하여도 의도를 모른다, 그들은 단지 막연한 추측만 가능할뿐이다, 그들은 이 시에서 "크나큰 고통" 이 어떤 문제? 무엇에 대한 고통인지? 어떤 과정을 쓴 내용인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내용은 자신이 경험을 하지 못하면 시인의 의도를 알수가 없다, 시의 어떠한 부분도 간단명확하게 설명할수 없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설명할수 없다면 시를 모른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시란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지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그녀처럼 사고에 해방이 없는 자- 즉 해탈을 하지 못한 자는 이 시의 내용을 알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면의 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읽는 자가 반드시 시인의 내면과 같은 수준이 되어야ㅡ 시의 의도를 명확하게 분석하고 간파할수가 있다, 그는 크나큰 고통에서 보다 냉철하게 자신을 통찰하면서 사고가 해방이 되는 과정을 이러한 시로 요약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내면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통찰하고 스스로 인식을 넘어서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선각자가 될수가 있고 무한하고 자유로운 사고로 해방이 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 )
(2)
나의 글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인성을 발현시켜 창의성을 높여 준다, 또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우울증을 예방하는 동시에 노년에 생기는 치매까지 예방한다, 내가 오래전부터? 시간이 날때마다 인터넷 토론방 등에 지속적으로 올리던 이 글로 인하여 정부가 인성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에 대한 주의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고, 치매의 문제도 중요하게 인식하여 "이제부터 치매는 국가가 관리한다!" 는 정책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나같은 사람은 나비 효과의 진리를 추구한다, 현자는 작게 외쳐도 멀리 나가는 법이다, 인터넷에 지속적으로 올리는 나의 글 때문에 정부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도대체 우울중과 치매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는데? 언제까지 모른체만 할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신의 실체를 분석하는 마땅한 방법도 없는데? 그것을 나같은 사람에게 물어 본다는 것은? 도무지 체면이 안섰던 것이다, 여하튼 정부가 심각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나섰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정신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도 없던 정부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활을 했다는 정도로 만족한다, 그러나 정부가 선도하고 예방한다는 몇가지 내용을 보니 여전히 주먹구구식 방법만 되풀이 할 뿐이다, 애초부터 인간에 대한 편견과 무지 때문에 막대한 혈세 낭비와 기회 낭비가 예정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내용을 의학계인 정신과나 정신과학, 또는 종교 등이 안다는 발상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들은 자신조차 모른다, 정신의 실체를 지식으로 아는 것인지 지혜로 아는 것인지 한번쯤은 거울을 보고 살펴 보라,,
(3)
나는 아직도 성경이나 불경을 모른다, 그러나 세계시를 통한 통찰과 지혜로 모든 것을 본다, 세계시는 정신분야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시는 정신의 핵심이고 가치의 제왕이다, 붓다의 시가 많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도 지혜를 알려면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시각을 넓혀야 한다, 오직- 종교적인 방법으로 지혜를 증득한다는 발상은 맹목적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종교에 능통하고 지식을 쌓아도 지혜를 알기가 어렵다, 종교의 예)를 들자면 기독교는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이 없다, 천주교는 수도사, 불교의 수행자가 있는데 이들 중 아주 극소수만 지혜를 증득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법이다,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은 쉽고 빠르며 현명해야 한다, 지혜라는 것은 정신분야에 관련된 책을 보아도 알수가 없다, 더구나 지식인이 정신분야의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그것은 엄청난 오해이며 착각이다, 지식과 지혜는 별개의 성질이다, 지식인은 지식적 타성과 인식의 모순으로 정신의 핵심을 알수가 없다, 그들은 아무리 명성이 높고 박학다식하고 하여도 지혜를 알수가 없다, 우리가 지식인과 소통하는 방식은 쉽지만 지혜인과 소통하는 방식은 제한되어 있다, 지식인의 글은 미사여구가 많아 재미를 주지만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은 들어 있지 않다, 반면에 지혜인의 글은 미사여구가 적어 재미는 없지만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이 들어 있다, 지혜는 기능적 지식과 관계가 없고 내면을 성찰하는 감성과 관계가 있다, 지식은 모두에게 배울수 있으나 지혜를 배우는 방법은 오직- 지혜를 증득한 자에게 배워야 한다, 말이란 지식은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기능적이고 표피적인 것ㅡ 우리는 그것의 내면을 알수가 없다,
(4)
누구라도 이정표가 없고 끝이 안보이는 길을 가지 않는다, 자신이 모르는 길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고 돌아오는 길을 잃으면 얼마나 낭패인가? 정신의 문제도 이와 같다, 자신도 모르게 번민과 망상의 길로 들어가 방황하다 돌아오는 길을 잃는다면 얼마나 두려운가? 가보지 않은 길은 문제가 따르고 위험을 동반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던 습관된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정신의 문제를 유발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생각의 길을 막아 혼란을 유발하고 만병의 근원을 만든다, 처음부터 가고 싶지 않은 길이고 부담과 혼란이 동반되는 곳이다, 스트레스는 내면의 가치를 왜곡시켜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우울증에 빠지게 유도하고 각종 사건과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치매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정신이 왜곡되면 알콜 중독, 마약 중독, 담배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등의 행위를 유도한다, 자신도 모르게 중독에 빠지고 습관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절망의 끝에서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문제도 생각이 왜곡된 경우이다, 자신도 모르게 분별력이 떨어지고 사고의 폭이 좁아지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우리의 사고는 외부에 습관되고 내면을 살피는 습관이 안되어 있다, 외부에서 습관된 지식은 고정된 관념을 쌓으며 인식을 확고하게 만들지만- 심신이 쇠약하면 자신이 완전하게 생각하던 만큼이나 무너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누가 그러한 문제에 노출되지 않으며? 누가 자신의 미래가 그렇치 않다고 보장하는가?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알고 있으며 예방하는 길은 있는가? 그런데 그곳에 길이 있었다, 정신의 실체를 자각하고 그 길을 지나간 세계의 시인과 철학자, 성인이 "누구라도 노력하면 지혜의 경지로 간다! 고ㅡ가르쳐 준 것이다,
(5)
우리는 정신이 왜곡되는 원인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언제나 문제에 직면하고 막다른 길에서 후회한다. 더러는 남들의 문제라고 회피하고 더러는 종교를 찾아 가지만 그것조차 완전히 믿기가 어렵다, 자신도 모르는 신에게 매달리는 것이 막연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무리 종교를 찾고 신을 믿어도 의문은 남게 마련이다, 과연 신은 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확인 할수는 있을까? 하지만 그것을 아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찾고 신을 믿으려는 노력보다 자신을 아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아는가? 옛날부터 세계의 시인과 철학자, 4대 성인이라는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예수가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깨달아 부처가 되어라! 너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자유하여라! 는 등- 간단 명확한 말로 지혜를 설명하였다, ( 모두 같은 말이니 혼동하지 말자! ) 사람들은 그말을 믿지 않았다, 부디- 자신에게 잠재한 지혜를 발견하고 무한하고 자유롭게 되어라ㅡ고 간곡하게 당부를 하였지만 사람들은 설마? 하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길로 가려는 사람조차 터부시 하였다, 왜냐하면 위대한 사고방식과 드높은 명성의 선각자인 세계적 시인과 철학자, 성인들이 지나간 길은 사람들이 넘지 못하는 성역처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도 시도를 해보거나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길을 가던 사람조차 중간에서 체념하거나 포기를 하였다, 아직도 사람들은 지혜를 증득하면 얼마나 자신이 현명하고 창의적이며 자유롭게 되는지 모른다, 따라서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지혜의 가치를 알수가 없다, 사실 우리가 위대한 그들의 말을 믿던 말던? 종교를 찾아 신을 믿던 말던? 사실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가장 먼저 자신을 아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6)
그렇다면 지혜를 어떻게 아는가? 한 예)로 불교는 간화선으로 지혜를 가르친다, 그들은 머리를 깎고 삶의 전체를 종교에 귀의하지만 수년간 혹독한 과정을 거쳐도 극소수만 지혜를 증득한다, 이러한 결과는 그 방면에 고승들이 더 잘 안다, 일생동안 수행에 전념하고도 지혜를 증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헤아려 보라ㅡ오히려 종교가 혼란을 유도하고 인식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라ㅡ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샅된 말에 현혹되어 인식의 한계를 걸머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렇게 쓸데없는 자존심과 허세를 오기처럼 부리다 완전히 믿지도 못하는 종교에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렇게 마지막 결단처럼 종교에 귀의하고 오직 지혜만 바라보다 아무것도 모른채 허송 세월만 보내야 하는지? 더구나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사이에 심신은 쇠약해지고 우울증과 치매를 겪으며 죽어가야 하는지? 이처럼 자신을 모르는 인간은 불행하지 않는가! 어차피 그렇게 될바에는 내가 아는 현명한 방법을 시도하는 것은 어떤지? 그리하여 천천히 헤아려 보라! 아직도 저들은 내 말의 핵심을 모른다- 종교적인 방법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르며 간단하다는 것을! 따라서 평생에 있을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왜냐하면 여러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기나긴 삶에서 자신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부디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기를 기대한다, 그 길에 들어서면 마음이 나는 법을 알게 된다, 어떻게 사고의 균형과 자유가 이루어지는지ㅡ 어떻게 지속적인 행복을 얻게 되는지ㅡ 그리고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ㅡ 자신이 증득한 지혜의 눈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된다.
(7)
나는 이 글에서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에 세계시를 연결시켜 놓았다, 그런데 누가 "나도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세계시( 내가 말하는 세계시란 한국어로 번역된 것,)를 읽으면 지혜의 경지에 오르면 우울증이 없어지며 치매도 예방되나요? 하고 물었다, 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요? 지혜의 경지를 그렇게 가볍게 오르려고 하다니? 나는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았고 그의 기대를 들어 줄수 없었다, 사고의 발전은 한치의 공짜가 없다, 부단한 노력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성의 체득ㅡ세계 시를 모두 이해하고 안다고 하여도 반의 과정을 통과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세계시의 지혜를 모조리 체득하고 완전하게 되었다고 판단을 하였는데? 그것은 실로 엄청난 오해이고 착각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도 몰랐던 내 안의 감정이 심오한 문제를 일으키며 사고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나는 다시금 바닥으로 추락하였고 길을 잃고 방황하였다, 세상 어디에도 길은 있었지만 사고의 길은 찾을수가 없었다, 아득한 사막처럼 해메이고 방황하다 우연한 문제로 고개를 돌렸는데ㅡ 아ㅡ 거기에 새로운 길이 보였다, 세상에 그런 길이 있다니! 그것은 정신 발전의 지도에서 세계시를 아는 만큼 가치가 있었고 비중이 컸다, 바보같은 내가 세계시를 알고 세상을 다 가졌다고 판단하고 우월감에 도취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 가고 있는데ㅡ내 안에서 심오한 감정이 본능적 의지를 일깨우고 다시금 인식의 바닥을 시험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바른 길로 들어 갈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시로부터 알게 된 이성의 깨우침은 지혜로 들어가는 시작이었고, 감정을 체득하는 훈련은 지혜의 완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마치 우연처럼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가르침이 나에게 행운의 문을 열고 다가 온 것이다,
8 )
감정의 체득, 그것은 "마법같은 돈키호테의 속삭임!" 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자 나의 머리가 그곳에 꼿치면서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다, 이후에 예기치 못한 과정을 겪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심각한 동요를 일으켰다, 혼자서 감당하기가 역부족, 나는 막다른 골목에 부딛쳤다, 그러다 언뜻 스치던 사람이 청문회스타 노무현( 대통령이 되기 2년전? )이다, 어쩌면 그가 나의 문제를 해결하여 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전화를 하였다. 내가 말을 끝내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묵언의 통화, 나에게는 그것이 내안의 바닥을 확인하고 지혜의 다리를 건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던져 준 묵언의 의미가 감정의 바닥까지 흔들자 인식의 문이 열리면서 지혜의 완성을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등산을 하다가 절을 지나는데 고승들이 써놓은 시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런데? 저 시문은 너무 쉽게 보이지 않은가? 분명 나같은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나에게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이해가 되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현상이었다, 문득 나의 정신 세계가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불교 방송을 틀어 보니- 붓다가 말하던 세계는? 이미 도달하여 있지 않은가! 그리고 벌써 20년이 되어 간다, 나도 인생의 한때, 어쩔수 없던 머리와 주눅이 든 삶에서 한번 쯤은 부단한 노력을 다한 것이다, 아직도 그것은 사력을 다한 경기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나이 40세 무렵에 심각한 우울증을 겪다가 세계시를 접하고 보다 폭넓은 시각을 가진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면서 내 안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억겁의 세월을 돌아 보라ㅡ 인생이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찰나와 같다, 늘 깨어 있어야 하리니ㅡ 우리의 시간 개념이란 돌아 볼때야 확인될 뿐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삶에서 무엇보다 시간을 소중히 하기 바란다,
9 )
아인쉬타인은 1954년 철학자 에릭굿- 카인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게 신(God)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 또는 그 산물에 불과하다" 고 적었다. 아인슈타인은 "성경이 한편으로는 명예롭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 이라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그점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인쉬타인은 자신이 불교를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없었고 불교를 믿지도 않았다, 그가 말한 의도는 자신의 사고를 불교와 비교하여 보니 불교가 주장하는 인과응보와 닮았던 것이다, 인과응보- 사실 이 말은 상식적인 말이지만 가볍게 흘려 보내지 않던가? 우리는 말이 어렵거나 엄격한 이해는 부담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지혜는 노력하는 만큼 얻게 되는 것이므로 시간이 갈수록 간단 명확한 결과로 나타난다, 사고가 발전하는 방법은 과학적인 원리를 닮은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을 신뢰하고 일관성을 추구하면 과학이 계산하는 수처럼 스스로 완성되어 간다, 인식의 변화는 객관적으로 공정하고 상대적으로 동등하며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불교는 혼자서 깨달아 지혜의 경지에 도달한 자를 독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러 설익은 불교는 혼자서 깨달은 자를 자신들 아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항아리같은 종교로 깨달은 그릇이 편협하고 가소로울 뿐이다, 아인쉬타인은 "이세상 모든 것은 더 이상 걷어 낼 것이 없을때 까지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 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간단하게 설명 할수가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이라고 일갈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혁신과 창조의 아이콘 애플의 스티브잡스도 마찬가지이다, 한때 스티브잡스는 인도의 선불교에 심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없었고 선불교를 믿지 않았다, 아인쉬타인과 스티브잡스는 스스로 노력하여 지혜의 경지에 올랐던 것이다,
(10)
지혜의 경지에 있으면 모든 것이 심플하고 명확하게 요약이 된다, 스티브잡스는 존 스컬리에게 자신이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 파리에서 시인이 돼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ㅡ바로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시인은 본질과 핵심을 추구한다, 무엇이든 간단 명확하게 요약이 된다, 세기의 천재 아인쉬타인과 스티브잡스, 그들은 시적 사고를 지닌 것이다, 스티브잡스는 “사람은 천재가 아니면 바보이며 그 중간은 없다”고 말했다, 누구라도 지혜의 경지에 오르면 천재와 바보의 간극이 명확하게 보인다, 붓다가 말한 것도 같은 의도이다, 깨달으면 부처이고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다, 그 중간은 없다" 고 말했다, 아무리 지식인이 뛰어 보았자 부처의 손안에 있듯 인간의 정신은 지혜인의 손바닥 안에 있다, 스티브잡스는 자신은 "필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지혜가 통찰력과 직관을 관장하면서 인식을 간단명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척보면 아는 것이다, 이처럼 지혜를 증득하면 각자가 추구하는 개성만 다를 뿐- 같은 경지에서 최고의 가치로 확인 된다, 큰 그릇으로 작은 그릇을 담는 원리처럼 간단하게 진리가 드러난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지혜인의 길로 나아 갈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를 증득한 자로부터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주의하라! 지혜의 길이란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가면 평생을 해매이기 쉽상이며 중간에 스승을 바꾸는 것도 어렵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 모른 채 아까운 인생만 낭비 할수가 있다, 지혜의 길을 제시하는 자가 현명한 시적 사고관을 지니고 있다면 가장 빠르게 그 길을 찾아 가게 된다, 그대들은 너무 어렵게 그리고 멀리서 그것을 찾아 헤매인다, 그러한 곳으로 갈수록 헛 것만 찾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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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 와 EQ 는 무엇일까?
인간의 뇌는 지능( IQ )과 감성( EQ )이 존재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능( IQ )만 알고 있다, 오직 지능( IQ )만 추구하고 활용할 뿐이다, 요즈음 이외수 선생님의 주도하는 감성( EQ )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감성( EQ ) 전도사를 자청하고 있다, 우리의 뇌가 감성( EQ )이 높으면 어떠한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아직도 그것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가 없기에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분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뇌에서 지능( IQ )과 감성( EQ )은 각각 별개의 성질과 역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IQ란 지능을 말하는 것으로 기억과 기능을 형성하고 고정과 질서를 담당 한다, EQ는 지혜를 추구하는 것으로 감정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통찰과 직관을 담당 한다, 즉 감성이란 EQ는 인식의 변화를 조율하고 합리를 추구하며 위대한 창조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능( IQ )은 아이부터 청소년기에 인식을 형성하는 기능이고, 감성( EQ )은 청소년부터 성인기에 발전을 추구하는 기능이다, 따라서 아이는 지능( IQ )을 높이는 교육을 하고 청소년부터 성인기에는 인식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감성( EQ ) 훈련을 병행해야 한다, 인간은 반드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나이를 먹을수록 인성이 확립된다, 실로 나보다 지능이 높은 보통이나 이상인 자가 감성의( EQ )벽만 넘으면 누구라도 위대한 지성인이 될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대부분의 세계적 지성인은 보통의 지능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지혜를 통하여 최고의 능력과 자질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IQ와 EQ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인간적 완성인 지혜로부터 현명하고 획기적이며 독창적인 가치가 발휘 된다, IQ가 높아 지식과 재능이 뛰어난 영재들이 어른이 되어도 위대한 가치와 독창성이 없는 것은, 자신의 EQ를 발달 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IQ가 낮아도 EQ에 통달한 사람은 지식과 재능이 떨어져도 위대한 지혜가 발현되어 언제나 최상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극대화 시키는 EQ 즉 감성을 체득하고 인식의 벽을 넘어야 한다, 그리하여 변화와 혁신, 창조와 자유로부터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러한 인식의 상태를 세계관 또는 우주관이라고 정의한다,
문득 세계적인 하버드대 교수의 다중 이론이 생각났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그의 주장은 내가 주장하는 가치와 핵심에 다름이 아니다, 가드너 교수의 글이 내 글의 설득력과 신뢰성을 높여 준다, 그의 글이 보다 객관적인 사실로 증명되지 않은가? 나는 가드너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 따라서 그와 내가 주장하는 지혜의 그것은ㅡ 인간의 능력과 자질, 특성을 스스로 발전시켜 보다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무한한 인간으로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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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밑의 글은 인터넷 정보에서 하버드의 하워드 가드너교수의 글을 부분 발췌한 것이다,
다중지능 주창자 하워드 가드너 인터뷰
“현재의 교육 처방, 완전히 잘못됐다”
지난 20세기 동안 미국의 교육계는 소위 IQ에 대한 열광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립학교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IQ 검사를 했던 때와 그 점수까지 기억할 것이다 (우리 학교는 물론 그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선생님의 책상에 가서 각자의 점수를 확인했다 ). 뇌에 대한 연구가 오늘날처럼 뇌의 가소성 ( 자극에 의해 변화하는 성질 ) 을 규명하기 이전에는 인간의 정신 능력이 고정돼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IQ를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지능에 순위가 있다는 개념은 효율적이고 잘 정비된 교육 체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 ( 혹은 그렇지 않은지 ) 알게 된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개념이다. 지능에 대한 이 같은 단일한 시각은 오직 한개의 정답만 존재하는 획일적인 시험으로 학생과 학교의 발전을 측정하도록 조장한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지능에 대해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뇌 손상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예술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그의 연구는 뇌가 얼마든지 탁월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밝혀냈다. 1983년 출간된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마음의 틀: 다중지능(Frames of Mind: The Multiple Intelligences)》에서 가드너는 일곱 가지 지능을 제시했다.
음악 지능, 신체 지능, 논리수학 지능, 공간 지능, 언어 지능, 인간친화 지능, 자기성찰 지능이 그것이다. 지능에 대한 이 같은 새로운 개념은 교육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점차 널리 받아들여져 오늘날에는 지적 능력이 획일적이거나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거의 상식으로 여기게 되었다. 가드너는 IQ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기 위해 그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천편일률적인 시험과 단순 암기 위주의 교육 방식, IQ가 주도하는 현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최초로 다중지능 개념을 제안한 지 25년이 지나서도 가드너는 자신의 이론을 계속 발전시켜왔고, 몇몇 사립학교에서는 그가 제안한 교육 방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No Child Left Behind’( 뒤떨어지는 학생이 없게 하자는 부시 정권의 공교육 개혁 프로그램. 학생들의 평균 성적을 개선하기 위해 시험을 통해 각 주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해 결과를 발표함 ) 정책으로 인해 표준화된 시험이 공교육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기타 인터넷 내용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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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국립 영재 연구소 소장. 코네티컷 대학 교육심리학 석좌 교수, 백악관 영재 교육 최고 자문 위원인 렌줄리 교수(Dr.Renzulli)는…“지능ㆍ과제 집착성ㆍ창의성…영재 3대 조건”이라고 말한다,
영재교육에서 심화학습 3단계 모형을 개발하게 된 과정은.
▶ 당시 재직하던 학교에서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지능은 평범하지만 최고 성적, 최고 지능을 지닌 학생들보다 더욱 창의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학생들을 보게 됐다. 그래서 창의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됐고 결국 평생 관심분야가 됐다.
영재성이 발현되는 시기는 언제인가. 나이와 관계가 있나.
▶ 분야에 따라 영재성이 발현되는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 영재성이 발현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나이는 다양했다.
40대가 넘은 성인의 경우에도,영재성이 발현될 수 있을까.
▶ 그런 사례가 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던 분야에서 영재성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창의성 분야에서 엄청난 재능을 보이는 성인들이 있다.
포커스 기타 기사 참조 2010-05-28
렌줄리 교수(Dr.Renzulli 현재 미국 국립 영재 연구소 소장. 코네티컷 대학 교육심리학 석좌 교수, 백악관 영재 교육 최고 자문 위원 )가 세계에서 탁월한 지혜와 독창성을 보이는 위대한 사람을 연구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들의 공통점은 보통의 지능과 다름없었다,
하버드의 가드너 교수와 렌즐리교수도 내가 주장하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세계적인 학자인 저들도 내가 주장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지능이 떨어지는 나같은 자에게도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이 적용한 것이다, 초등학교 전체를 꼴찌로 졸업하고 21세? 나이에 겨우 중학교 졸업을 컷닝으로 통과한 자가 감히 무엇을 안다고? 이러한 글을 쓰고, 더구나 지혜란 것을 주장하겠는가? 단지 아래의 길이 훤하게 보여서 가장 쉽고 빠르고 현명한 길로 안내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세계의 저들과 같은 시각으로 핵심을 다루는 것이나- 지혜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금방 알수가 있지 않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드대의 가드너와 코네티컷의 렌즐리, 예일대학의 스탠퍼그 교수는 오랜 연구와 분석을 통하여 보통의 지능도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검증하고 확인하였다, 하지만 나는 저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고 선택한 경험으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서로 그길을 알았던 방법이 다르고 지나간 방법이 다르지만 지혜의 가치를 발견한 것과 주장하는 목표는 같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가치와 핵심을 저들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로 증명할 수가 있다, 저들이 연구 결과로 확인한 사람들이란? 결코 지식을 배우고 익혀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한때, 일정한 방법과 노력의 과정을 통하여 위대한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따라서 그대들은 세계의 지성인 가드너와 렌즐리, 스텐버그 교수와 내가 경험으로 주장하는 지혜의 가치를 그대로 신뢰하고 추구할 것인가? 그렇치 않을 것인가? 에 따라서 삶과 미래가 결정된다, 왜냐하면 위대한 가치인ㅡ 지혜의 경지! 그것은 분명 억지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천재가된다"
지적 능력이 중상 정도만 되어도 심력이 강하면 영재로 성장 할수있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렌즐리교수-
저들이 보통의 지능으로 위대하게 된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 너무 많아 간단하게 예) 로만 들겠다, 렌줄리 소장이 오랜 연구 결과로 위대한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고 강조한 것은 지능이나 나이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이다, 누구라도 자신에게 잠재된 인식의 가치를 자각하고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세계의 지성인 그들이 왜? 어떻게? 위대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설명과 방법은 이 글의 끝으로 가면서 결론으로 설명하겠다, 단지 간단 명확하게 요약을 하자면,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높이고 위대한 지성인이 되려면 반드시 EQ를 체득하는 과정을 거치고 인식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현자의 말처럼 “파도가 올라가면 모든 배는 다 올라 간다" 는 뜻은- 내가 주장하는 지혜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우리는 오직 한가지- 지혜만 증득하면 모든 것이 따라 간다는 진리를 간파하고 시기 적절한 때를 활용해서 그것을 시도하도록 유념하라, 그대들은 내 말을 믿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내용의 글은 몇 문장만 보아도 쓰는 자의 의도가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가! 더구나 정신 발전에 관한 지혜의 내용은 자신이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단 한 문장의 내용도 쓸 수가 없다, 그대들은 내 말을 신뢰해야 한다, 내가 주장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지혜를 배우는데 가장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저들이 주장하는 지혜의 길을 가장 빠르고 쉽게 가르쳐 줄 유일한 이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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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정보 참조
[생각의 탄생]
세계적 배스트셀러 저자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말하는 창의력과 리더십-
지혜, 직관, 연마하면 70대도 가능- " 미래엔 지식의 양보다 창의성이 중요"
창의력이나 상상력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물론 창의력.직관력은 부분적으론 타고난 재능이다. 그러나 누구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재능을 계발할 수 있다. 학교에서 악기 연주나 그림 그리기를 배웠던 경험을 떠올려 보라. 천재의 대부분도 노력파였다. 모차르트나 아인슈타인도 잠을 줄여 가며 일했고, 그들에게 닥친 시련을 이겨 냈다. 창의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천재들이 간 길, 그들이 활용한 생각의 도구를 습득하고 연마하는 것이다. 같은 노래라도 뛰어난 가수에게 배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책에서 감성과 놀이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게 사고력 강화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끼치나.
"분야를 막론하고 노벨상 수상자들은 직관이 매우 발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수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수학적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이 주는 느낌을 바닥에 구르고 의자에서 뛰어내리는 등의 육체적 움직임으로 표현하곤 했다. 숫자는 무형의 것이지만 파인먼은 머릿속에서 그것을 분명한 형체로 인식할 줄 알았다. 이런 능력을 키우려면 실제로 손을 자주 쓰고 신체적 놀이를 즐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대학 시절 자전거 조립에 몰두했으며, 지금은 가구를 짠다. 아내는 뜨개질을 즐긴다."-40대, 50대가 돼도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는가.
"세상에는 50대에 첫 책을 내고 60대가 돼서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쌓인 지혜와 직관을 창조적 생각 도구를 통해 연마하면 70대에도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경영자나 과학자에게 교양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양은 삶이며 우리가 어떻게 인류가 중시하는 가치에 도달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억의 기록이다. 또한 교양은 좋은 시민을 만든다. 특히 과학자나 기술자에게는 교양의 기초가 반드시 필요하다. 위대한 발명을 하려면 문화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발명품이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쓰이고 보급될지,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지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발명가는 자신의 발명품을 세상에 알리고 효과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효율적인 의사 전달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교양이 바로 그런 일들을 가능케 한다. 혁신가(이노베이터)야말로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휴먼아트)와 소통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이들 부부는 "자녀를 창조적 인물로 만들려면 지루하고 따분하게 만들라"는 이색적인 주문을 했다. 부모들은 대개 아이가 가능한 한 많은 활동을 해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놀이 방법을 창안해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유명 오페라 공연을 보여주는 것보다, 스스로 대본을 쓰고 의상을 만들어 연극을 연출해 보도록 하는 것이 창의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고? 중앙일보 기사 참조
예)
(1) ‘생각’을 다시 생각하기
(2) 상상력을 학습하는 13가지 도구
(3) 생각도구1 관찰
(4) 생각도구2 형상화
(5) 생각도구3 추상화
(6) 생각도구4 패턴인식
(7) 생각도구5 패턴형성
(8) 생각도구6 유추
(9) 생각도구7 몸으로 생각하기
(10) 생각도구8 감정이입
(11) 생각도구9 차원적 사고
(12) 생각도구10 모형
(13) 생각도구11 놀이
(14) 생각도구12 변형
(15) 생각도구13 통합
위의 글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이러한 내용은 부분적으로 동의할수 있어도 시도하는 방법은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위에 열거한 단계 중 한개만 부족해도 위대한 지성인이 될수 없다는 뜻이다, 최고의 영재가 되는 방법을 15가지로 요약해 놓았지만 각 단계마다 어디까지 정해야 되고 어디까지가 끝인지 가름이 되지 않는다, 지식을 배우는 방법은 설명하였으나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지식이 탁월해도 지식만 배운 자들은 엉클어진 실에서 한 오라기만 잡아 올리는 지혜를 모른다, 나는 그러한 방법을 처음부터 배제한다, 그리고 단 한가지, 모든 것을 끌어 올리는 지혜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가 주장하는 방법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되어 있고 시작과 끝을 혼자서 검증하고 알수가 있다, 사실을 알고 보면 렌즐리 교수가 확인한 위대한 그들은 15가지 단계를 거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장하는 두 단계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세계에 위대한 자들의 언어와 행위, 작품도 똑똑한 지식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현명한 지혜를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개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단지 우리보다 먼저 지혜를 증득했다는 이유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자는 시로 어떤자는 소설로 어떤자는 철학으로 어떤자는 음악으로 그리고 어떤자는 미술로 어떤자는 조각으로 어떤자는 과학으로 어떤자는 정치로 그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지혜의 경지에서 표현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한길은 여러길로 통하고 여러길은 한길로 통한다, 세계적인 그들의 언어와 행위, 작품의 가치와 의도를 알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아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도구에서 가능할 뿐이다,
위대한 지혜는 지식의 가치를 알지만 지식은 지혜의 가치를 알수가 없다, 그것은 위의 가치에서 아래의 가치를 알아도 아래의 가치에서 위의 가치를 알수가 없는 원리와 같다, 지혜란 같은 눈높이에서 보아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지식의 상위 개념이 지혜란 말은 영원한 진리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세계적인 그들의 언어와 행위, 작품은 시적 가치와 핵심이 압축된 표현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혜의 언어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혜를 증득한 시적 사고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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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 A. 슈바이처,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형성에 있다. 교육의 목적은 기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또한 교육의 비결은 상호존중의 묘미를 알게 하는데 있다. 일정한 틀에 짜여진 교육은 유익하지 못하다. 창조적인 표현과 지식에 대한 기쁨을 깨우쳐주는 것이 교육자 최고의 기술이다. -아인슈타인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이란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정신이 죽어 있는 삶을 이른다. -A 슈바이처
*진리에 대한 의지와 마찬가지로 성실성에 대한 의지도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실성에 대해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시대만이 그 속에서 정신력으로 살아 움직이는 진리를 소유할 수 있다. 성실성이란 정신 생활의 기본이다. 성실성이 튼튼히 자리하는 곳에 평온이 깃든다. 평온은 성실성의 깃발이다. A -슈바이처
*나의 길을 밝혀 주고, 항상 인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친절과 미(美), 그리고 진리였다. -아인슈타인
*내가 성취하고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은 진리와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아무도 즐겁게 하지 못하는 위험에 대한 정의에 봉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아인쉬타인-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神秘)이다. 참된 예술과 참된 과학의 요람은 바로 이 기본 감정이다. 그 누구라 하더라도 이 점을 모른다든지, 또 신비스럽게 느끼지 못하거나 경탄할 줄 모른다든지, 또 신비스럽게 느끼지 못하거나 경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으며, 그의 눈은 어두운 것이다. -아인슈타인,
해설-
아인쉬타인과 A- 슈바이처의 어록이다, 이들의 정신 세계는 일반인과 다르다, 지혜를 증득해야 비로소 진리를 통찰하는 어록이 생긴다, 이들은 지식을 배웠지만 부단하게 노력하여 지혜를 증득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지혜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를 든 어록만 봐도 저들이 어떻게? 세계의 지성으로 불리우고 선도적 역활을 하게 되었는지? 금방 알수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저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 위대한 지혜를 증득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시적 사고관인 지혜가 완성된 자들은 인식이 깨어서 상황과 변화에 부합하고 가치와 핵심을 유도한다, 시공간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지혜가 현명한 사고를 유도하며 전체를 관리하는 것이다, 저들의 공통점은 정상에서 아래를 보는 진리처럼 가치와 핵심을 요약하는 지혜의 눈을 가진 것이다, 누구라도 지혜를 증득하면 이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각자의 개성처럼 표현만 다를뿐이다, 나 역시 그러한 사고를 지녔다, 나는 가치와 핵심을 요약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인이므로 이러한 설명의 글로 재미와 호기심을 주지 못한다, 나의 말은 소설가나 작가의 그것보다 흥미가 없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구나 우리는 지식적인 말과 기능적인 환경에 습관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대가 알수만 있다면 좋은 말이나 글 일수록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것이 지혜의 가치이다, 이러한 내용의 글에서 화려한 말과 지식이란 쓸데없는 오해를 부르고 인식을 흐리기 쉽상이다, 시인의 사고( 한국의 시인은 지식인에 불과하므로 나의 글에서 제외한다, )는 확고한 신념을 통과하고 진실한 가치와 핵심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것만이 최고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지식만 아는 영재의 불행
어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명성이 자자했다, 마침내 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성공하였다, 그리고 성인이 된 어느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지금까지 자신은 남의 흉내만 내고 있었다!"고 고백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무릇 위대한 예술가란 아무리 재능이 탁월해도 자신을 아는 지혜가 없다면 독창성이 없게 마련이다, 지식은 기능적인 것ㅡ 지혜는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을 많이 알고 유창한 영어를 하며 어려운 고사성어를 줄줄 외우고 똑똑하다는 소문이 났어도 인성, 즉 인간적 가치가 발현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혜가 없는 그것은 남의 흉내만 내야 하는 짝퉁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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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분별력을 요구하고 지혜는 정신을 가름한다, 흔히 똑똑한 자는 말을 잘하고 현명한 자는 말을 바르게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정신을 가름하는 지혜가 없다면 스스로 말을 가려낼 만큼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말이라는 지식에 습관이 되어 객관적 사실로 간파하지 못한다, 처음에 말 머리가 언제부터 꼬리로 변하여 있는지도 간파하지 어렵다, 시간과 환경에 변하는 상황조차 고정된 재단을 하고 그것을 사실처럼 느끼고, 말로 인하여 오해를 부르고 착시현상에 빠지기 일쑤이지 않은가? 이러한 현상은 세월이 갈수록 분별력을 약화시키며 자신을 기만하고 위선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아이는 똑똑해야 하지만 어른이 되면 현명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똑똑하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청맹과니가 되는 줄 모르고 살아 간다, 그러나 지혜를 증득한 자에게 물어 보라ㅡ그들은 단 하루를 살아도 지난날의 삶으로 돌아 가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라는 지식을 깨우친 자로 암흑과 광명의 간극이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빠르고 복잡하며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무엇보다 언어를 분별하고 인간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현명한 자의 삶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신에 부여된 말, 즉 언어의 모순과 균형의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 알아서 풀어야 하는 숙명같은 것이다, 인간은 지혜를 모를수록 언어의 성질을 모르고 언어의 성질을 모를수록 스트레스를 야기한다, 스트레스는 미리 자각하고 경험으로 알수 있지만 우울증과 치매는 현재의 상태로 오는 것ㅡ 그것은 더욱 가혹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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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는 보다 편리한 언어라는 도구를 활용하고 지식에 습관이 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인식은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을 모른다, 언제나 지식은 욕망을 부추켜 가치를 비교하고 타성의 늪으로 인식을 유도한다, 지식이 욕망과 뒤섞이면 혼란과 갈등 속에서 허우적 거리기 마련이다, 그곳은 벗어 나려고 할수록 더욱 깊이 빠져 들고 만다,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는 지혜라는 현명한 도구를 모른다, 그러한 문제와 원인을 알려면 먼저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결코 회피하거나 잊혀지길 기대하지 말자! 어떤 것도 조금씩 다가서면 부담이 줄어 들고 서서히 적응하게 된다, 순수와 정직ㅡ그것이 처음의 시작이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내면과 외부가 일치하도록 보다 성실하고 진지하게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자 지혜로 들어가는 핵심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귀에 가장 먼저 다가 오지만 가볍게 여기거나 모르고 지나친다, 우리의 인식은 외부에 습관되어 내면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고 스스로 마음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만들지 못한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흥겨운 시간이 끝나면 인생의 어둠과 그림자는 찾아 오기 마련이다, 지식만 추구하고 행복하게 여기던 착각속에서 삶은 뒷통수를 맞는 것이다, 심신의 쇠약으로 확인되는 노년의 고약함, 혼자되는 고독과 번민, 망상, 끝없는 자기 부정 등의 정신적 손실이 늘어나고 의지는 흔들리니- 자신을 아는 지혜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공평 그리하여 진정 그대는 모르리라- 옆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도 슬픔과 고통을 감추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서글픈 자존심을! 누구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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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ㅡ" 종교는 미래를 이끌 수 없다! " 동아일보 기타기사참조 2013, 02,16
인류에게 종교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수많은 사람이 종교를 통해 삶의 위안을 얻고 있지만, 또한 수많은 사람이 종교 때문에 삶의 파탄을 겪고 있다. 굳이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뉴스에서 접하는 충돌과 분쟁의 상당 부분이 종교 간의 갈등이다. 그러한 갈등은 가까이는 이웃 간의 화합을 저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 대량살상을 야기하고 국제난민의 발생을 초래한다.그 원인이 종교라기보다는 종교로 포장된 정치적이거나 기타의 세속적인 욕망에 있다는 진단도 있다. 하지만 종교가 악용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수많은 종교 구성원이 그러한 갈등의 프레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할 수 없다. 망명 티베트의 지도자를 넘어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달라이 라마는 이 책을 통해 “종교는 더이상 미래를 이끌 수 없다. 이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고 선언한다. 불교라는 종교의 지도자인 그가 종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달라이 라마의 과감함과 솔직성이 있으며, 그 인격의 위대함이 있다. 종교가 아니라 특정 단체의 지도자라고 해도 그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한계를 넘어선다.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달라이 라마가 ‘종교를 넘어’라고 주장한 것이 종교를 무시하거나 인류에 대한 종교의 기여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역할을 지구촌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그 개별성으로 인한 한계를 인정하면서 재설정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종교와 보편적 도덕을 분리하자는 제안에서 뚜렷해진다. 개별 종교는 더이상 그 자체로는 보편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자체의 형이상학적 입장에 입각해 도덕을 확립하려는 시도는 이제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모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도덕의 확립을 통한 지구촌 인류공동체의 형성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그 보편적 도덕에 대하여 현세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현세적으로’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세속적 가치를 추종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그의 책 후반부는 불교적인 도덕을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실천할 수 있는 도덕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곧, 윤회나 업 등 현대적 합리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전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보편적 지성에 호소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다른 종교전통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불교로 개종하거나 불교적인 내용을 어렵게 배우려 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친숙한 전통을 소중히 하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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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달라이라마의 의도란?
세계 불교계가 존경하는 스승이자 현존하는 부처라고 불리우며 존경받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ㅡ 달라이라마, 그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달라이라마가 정신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쓴 책은 40여권이 넘는다, 그가 쓴 책은 세계 50여개국에 번역되어 400만권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중이다, 위의 기사는 달라이라마가 지구촌 사람들을 위하여 심사숙고한 끝에 발표한 내용이다, 그가 세계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나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통찰한 지혜로 풀어내는 탁월한 가치와 설득력을 보여준 내용 때문이다, 그의 글은 세계의 어떤 철학자나 정신분석 학자, 심리학자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가치와 핵심을 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혜로부터 발현되는 통찰과 직관이 예리한 분석과 명확한 설명을 유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혜를 증득한 자에게 최고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고 빠르며 현명하게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도록 유도할수 있을 것인가- 에 초점이 모아진다, 지혜를 증득하는 목적은 자신의 인성을 최고의 가치로 발현하는 것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방법은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대중화에 다름이 아니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이 지닌 종교적 가치와 핵심을 도덕적 가치와 핵심에 비교하고 지구촌 사람들을 위한 결론으로 가장 명확한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이 종교보다 도덕적 과정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신이 지도자로 있는 종교를 넘어 위대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의 지혜로부터 냉철하고 사려깊게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 도덕적 과정이 종교적 과정보다 쉽고 빠르며 현명하게 지혜를 증득하게 유도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종교보다 도덕이 인간의 미래를 열게 될 것이라고 결단을 내리고 세계에 공개 선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순종적이고 맹목적이며 절대적인 가치보다 시와 철학을 통하여 균형과 조화를 유도하는 도덕이 보다 인성의 자각성을 높이면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발전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달라이라마가 종교적 관점과 도덕적 관점을 비교한 것은 세계의 인문,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두를 포함한 전체적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지혜의 경지에 이르면 무엇이든 척보면 알아서 가치와 핵심을 현명하게 조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종교지도자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 양심을 지혜를 간파하고 가슴으로 새겨 들어야 한다, 실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지혜를 유도하는 가치와 핵심은 도덕의 핵심 즉 시적 사고관이라는 것을! 이처럼 위대한 지혜를 증득한 지도자는 자신을 넘고 종교를 넘어 인류를 위한 모든 면에서 자유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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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도덕의 바탕은 무엇인가?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양심이다, 양심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신을 탐구하는 철학이다, 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시이다, 달라이라마가 말한 방향은 도덕이지만 핵심은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사고관을 키워야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는 시인이 될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적 사고관을 지닌 위대한 달라이라마가 못다한 의도를 간파하고 스스로 알아 차려야 한다, 인문학의 핵심이 시이듯 종교의 핵심도 시로 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한국은 지식인이 쓴 시가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거나, 개인적으로 시를 쓰거나 혹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면 그들을 시인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은 세계 시인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시문학과 문학의 지도층은 시인에 대한 가치와 핵심을 잘못 이해하였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한국 시문학의 지도층은 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일반적 지식인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을 아는 만큼 남이 보이는 법이다, 이들의 시문학 수준은 세계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가치 평가를 하는 수준이 안된다, 세계의 시문학에서 일반적 지식인을 시인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따라서 국가의 인문학적 가치와 핵심을 정신적 발전의 시각으로 볼때, 지식인이 쓴 수준의 시를 시인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한국의 시문학 지도층 수준이 참으로 놀라웁고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국가에 정신적 가치이자 발전의 핵심인 시문학이 공론의 장인 매스미디어를 타고 버젓이,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정신문화 질서의 악순환을 유도하면서 짝퉁 시인들을 양산하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시인과 시문학의 현실이다, 우리는 시인에 대하여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세계 시인들의 공통점은 시인이란?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자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공인된 시인으로 평가한다. 세계적인 시인은 모두 여기에 해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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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불교계에 현존하는 부처라 불리는 양대산맥은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이다,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노벨평화상 후보자이자 세계 불교계의 상징적 인물인 틱낫한 스님은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는 결코 종교적 내용이나 종교적 어법으로 법문을 말하지 않는다, 시적 언어를 법문으로 활용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 한다, 그의 언어는 간단 명료하여 알아 듣기에 쉬우며 담백하기 그지없다, 마치 고요한 숲속에서 울리는 자연의 소리처럼 고요하고 순수하며 정직하게 다가온다, 어느새 시어가 가슴에 들어와 살며시 속삭인다, 누구라도 위대한 지혜의 경지에 오르면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처럼 시적이며 철학적인 사고관이 생긴다,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을 보아도 알수가 있듯이 위대한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면 인식의 가치와 핵심이 같다, 달라이라마는 철학적인 설법으로 유명하고, 틱낫한 스님은 시적인 설법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법문의 방식은 단지 각자의 개성일뿐 가치와 핵심을 보는 차이는 같은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노력하여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언제라도 무한하고 자유롭게 인식이 깨어 있어 최고의 상태에서 자신의 가치와 핵심을 드러 낼수가 있다, 누구라도 지혜의 경지에 오르면 그것이 가능하다, 그곳에는 걱정도 고민도 망상도 번민도 머무를 거처를 마련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적 소모가 거의 없다, 지혜가 스스로 자유자재하며 여과하기에 어떠한 스트레스도 최소한으로 줄어 든다, 더구나 생명이 끝날때까지 우울증과 치매도 없다, 언제이든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마음의 휴식처로 들어 갈수 있다, 시공간의 무한한 자유로부터 변화에 부응하는 독창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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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는가? 종교가 주장하는 "믿음"이나 "믿는다" 라는 말조차 불완전 형용사이자 불완전 동사"라는 것을? 물론 종교란 각자의 선택이고 자유로이 지녀야할 가치이다, 나는 종교를 예로 들지만 한편으로 종교를 이해하고 싶기도 하다, 나도 한때는 혹독한 우울증을 겪다가 도저히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종교를 찾아 나선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누구나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기에 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울증에 따르는 치매도 마찬가지다, 누구라도 그것을 지식과 종교, 웃음이나 유머 따위로 해결하지 못한다, 유머의 달인이라고 불리었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0년간 치매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론 레이건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정신을 잃어가는 것, 인간의 가치가 와해되는 것을 지켜 본다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며 회고하였다, 어릴때부터 똑똑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철의 여인 전 영국수상 대처도 그의 딸이 "9년째 치매를 앓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실로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문제가 되는지, 무엇이 가장 행복하고 완전한 것인지 진지하고 사려깊게 통찰해야 하리라! 노벨문학상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헤르만 헤세는 그의 시에 "당신이 행복을 찾아 나서는 동안은ㅡ 당신은 아직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록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 당신의 것이라 하더라도!ㅡ" 라고 하였다, “헤세는 인간의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는 것일까? 사실 그는 상황과 조건에 변하기 쉬운 행복을 말한 것이 아니다, 행복의 가치를 명료하게 아는 시인인 자신처럼- 누구라도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불행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이고 완전한 행복을 유도하는 현명한 방법을 알아야 한다, 실로 그것만이 품위가 있고 숭고한 인간다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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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교육은 다양한 지식을 배워서 스스로 적성과 재능을 발견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혜로 아는 교육자가 인성을 발현하게 유도하면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가치와 핵심을 찾아 간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야 자신의 개성과 자아를 추구하고 자질과 능력을 극대화 시키게 된다, 그것이 자유롭고 무한하게 독창적으로 만드는 인간 교육이다, 우리는 핀란드 교육만 보아도 알수가 있다, 핀란드 교육은 사회적인 지식과 인간적인 감성이 세밀하고 적절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인성 교육은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의 상태를 최고로 유도하는 지혜의 가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핀란드의 아이들 교육은 한국의 아이들처럼 바쁘게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지식만 쌓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혜를 아는 어른들이 가치와 핵심을 선별하여 지식과 지혜가 부합하는 최적의 교육을 유도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성인이 되어가는 시점에 조금만 동기 부여가 되어도 깨달음을 자각하고 지혜의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핀란드는 우울증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씨와 환경, 분위기가 그렇게 되기에 알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핀란드는 국가 경쟁력 1위, 교육 경쟁력 1위, 행복지수 1위,이다, 그들은 정신적 가치와 핵심을 유도하는 방향이 서로에게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최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혜를 깨달은 자들이 교육에서 가치와 핵심을 시적 사고관으로 유도하니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완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교육을 모르고 가치와 핵심을 모른다, 한국의 교육은 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남을 흉내 내기에도 바쁘다, 하나에서 열까지 선진국에서 발전되고 창조된 가치들을 들여와 기능만 배우고 익혀서 단순 모방에만 급급하다, 그것은 우리가 사고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후진적인 현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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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IMF 이후로 성장이 멈추고 퇴보가 진행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지식을 쌓을수록 표피적인 인식이 되어 적당주의와 기회주의에 빠지기에 알맞게 된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사회 지도층이 되면 인식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질이 떨어져서 남을 모방하거나 착취하는데 습관된다, 더구나 한국은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유교 문화를 이어받아 무지의 악순환에 빠지기도 쉽다, 따라서 한국의 교육에 선진국의 교육을 체화시키는 것도 대안의 방법이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이미 한국의 지도층이 기득권 패거리를 형성하고 아래 계층에 기생하는 방법에 면역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한국은 정신문화가 발전하는 방법을 모른체 대를 이어 왜곡된 바탕을 이어가고 있다, 위대한 지혜를 모르는 나라는 각종 부작용과 후유증을 양산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이 선진국이 될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부단한 노력으로 증득하는 지혜처럼 단 한번만 완벽을 추구하고 일단 들어가면 영원히 지속이 되는 선진국, 언제까지 한국은 변방의 북소리만 낼 것인지 난감하다, 미래는 혁신과 창조가 발전의 가치로 나타나고 그러한 가치와 핵심은 지혜에서 발현되지만 오직 지식만이 최고라는 풍토에서 준비가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계시를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그것을 선도적인 정신문화로 유도하고 인식에 체화를 시키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인간은 언어를 도구로 살아 간다, 인간과 자연을 함축한 가치와 핵심이 바로 시이다, 우리는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야 새로운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러나 한국은 그러한 방법을 모르고 선진국의 가치와 핵심을 모른다, 선진국이 되려면 기존에 지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지혜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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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소통과 감성의 대가로 불리우는 시인이자 소설가 이외수, 한국에서 가장 많은 팔로우로 트위터 대통령이라 불리는 그가 어떤 책에서 유난히 강조한 문장이 생각난다, "그대여 부디 시ㅡ 속에서 살아라!" 고 당부한 것이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이다, 그가 만든 어록은 자신이 증득한 지혜로부터 나온다, 전체를 핵심으로 요약하고 가름하는 발원지가 지혜를 증득한 시적 사고관이라는 것을 자신이 알기에- 우리에게 인생의 한번쯤은 시와 같은 삶을 살아 볼 것을 당부한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내가 우연하게 시를 접하고 새로운 지혜를 증득한 후에야 그 말을 돌아보고 비로소 의도를 알았던 것이다, 그는 시로부터 감성을 위한 훈련을 하고 본능적 의지에 다가서야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에게 본능적 의지를 세우고 감성의 힘을 불어 넣는 원동력은 시이다, 왜냐하면 인식을 자각하고 깨우침을 유도해서 인간의 완성을 유도하는 것이 시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대여!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라, 좋은 사람은 좋은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그대가 어둠의 절망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 그들의 말 한마디는 희망의 등불이 되어 준다, 지혜를 증득하는 시인이 되려면 어떠한 자격이 필요할까? 그대여 놀라지 마라 - 단지 보통의 지능만 있으면 된다, 시인, 그것은 본인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을뿐이다, 나처럼 지능이 떨어지고 지식이 없어도 되지만- 그렇다고 지능이 높고 지식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세계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지식이 없었다는 것을 유념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누가 명확하게 알수가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가? 지혜의 성, 그곳에는 인식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알려면 우리도 지혜의 경지에서 통찰과 지혜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정신 세계는 지혜를 증득한 시인과 철학자, 성인 등이 가치와 핵심을 선도하면서 발전한 것이다, 미래의 시대 또한ㅡ 그렇게 예정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시도를 하려면 무엇보다 인문학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지혜를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먼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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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시자이자 빌게이츠는 "지금까지 자신을 만든 것은 인문학"이라고 정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혁신과 창조의 리더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인문학과 과학의 교차점"을 주장하였고, 페이스북의 창시자 마이크 주커 버그도 "인문학이 창조의 발상지"라고 주장한 것이다, 혁신과 창조에서 세계 최고의 가치와 핵심을 보여 주었던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대학교 중퇴자라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한 인문학은 그동안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웠던 지식이 모자라서 후회가 되거나 미련이 남아서 우리에게 인문학의 지식을 배우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대학교를 중퇴한 후에 더 많은 지식을 원하지 않았고 보다 특별한 지식을 배우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문학의 지식보다 인문학의 지혜를 통하여 시적 사고관이 완성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인문학의 가치와 핵심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인식이 최고의 가치로 발현되는 인문학의 지혜를 배우라는 의도이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자신의 가치를 떨어지게 유도하고 세월이 갈수록 불행하게 만들기에 인문학의 지혜를 증득해서 현명한 차원으로 높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의 핵심적 정의가 바로 시- 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시적 사고관의 지혜를 증득하면 자신처럼 될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한 핵심과 최고의 관점은 지식과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와 통찰의 문제라는 점이다, 우리는 인문학의 지식보다 압축적 가치인 지혜의 시를 정신문화에 접목해야 한다, 참고로 이들이 노력하여 만든 천문학적인 부는 최소한의 것만 자식에게 물려주고 모두 사회로 환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의 인성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내가 앞에서 설명을 하였듯이- 지식만 배운자는 그러한 생각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러한 지혜가 나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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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기의 기능에 대하여
세계는 왜 스티브잡스에게 열광하는가?
( 인터넷 정보 )
현 시대의 I,T 신화와 창조의 아이콘은 스티브잡스로부터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세계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I,T를 비롯한 미디어 업계는 물론 출판, 신문까지 혁명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가 만드는 새로운 작품들은 세계에서 날개 돋친듯 팔리고 있으며 다음에는 무엇이 창조되어 나올지 세계가 집중하고 기대하고 있다, 그가 일으키는 혁신의 바람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창조적이고 혁신적 CEO의 대표주자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시- 읽기를 강조하는 CEO로도 유명하다. 일상에서 젖는 습관적 사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시 읽기’를 꼽는다. 그는 생각이 막힐때 시- 한줄에서 답을 ?는다고 한다,
참고
우리는 스티브잡스가 주장한 시읽기를 오해하거나 착각하기 쉽다, 그가 말하는 시읽기란- 시에서 아름다움을 감상한다거나 센치한 감정에 빠지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스티브잡스가 의도하는 핵심은 "시읽기로부터 다양하고 세밀하게 분석하는 이른바 "인식을 여과하는 과정!" 을 의미한다, 그는 단 한편의 시를 읽더라도 다양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헤아리는 여과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한 시읽기 과정을 통하여 인식을 여과시키면 다시금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던 경험을 자신이 알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이 정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가장 효과적이란 것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기에 우리에게 시읽기의 "과정을"권하는 것이다, 그가 한줄의 시에서 답을 찾는다는 말도 결코 시에 답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시읽기 과정이 지혜를 유도하여 현명하게 "답을 찾게 만든다"는 것을 의도한다, 그는 시읽기를 통하여 정신을 맑게 하고 지혜를 유도하는 필터의 기능으로 "시읽기의 과정"을 활용한 것이다, 그가 시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자신처럼 지혜를 증득한자도 일상의 문제와 이해관계의 타성적 흔적이 묻어나기 마련이므로, 보다 짧은 시간에 시읽기의 과정을 통하여 최고의 상태로 돌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시읽기를 하는 과정에 인식이 자각의 길을 지나면 어느새 맑고 밝으며 새롭게 정화되어 있는 것이다, 스티브잡스는 시읽기를 통하여 언제나 최고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였고 세계적인 시인과 같은 지혜의 경지에 있었다, 스티브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대 연설에서 암투병을 소개한 일이 있다, "내가 (암으로 )죽음에 직면했던 경험은 이후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선 모든 것들, 실패의 두려움이나 부담감과 같은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고 진실로 중요한 것이 남기 때문에" 라고 말했다, 나는 스티브잡스가 죽음에 직면하기 훨씬 이전에 우울증을 앓은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은 암이라는 병이 생기면 심신이 쇠약하고 죽음부터 생각하므로 감정이 주눅들면서 우울증이 오기 마련이다, 더구나 죽은 후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혼란은 인식의 장애를 일으키고 감정은 눌리게 하여 우울증을 부르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스티브잡스는 슬픔과 고통의 바닥인 그곳에서 냉철하고 사려깊게 자신의 가치와 핵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곧 죽는다는 두려움과 공포, 슬픔과 고통을 부단한 노력과 인내로 자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바라 보는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위대한 지혜를 증득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으며 무한하고 영원한 인식의 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그가 인간의 죽음조차 삶이 만든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찬미한 것은 가치와 핵심을 분별하고 인식의 영원까지 통찰하는 시적 사고관ㅡ 즉 지혜의 경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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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낭송하거나 외우는 방법은 어떤가?
시를 낭송하고 듣거나 외우는 방식은 일종의 형식이고 쑈일 뿐이다, 그것은 교육적인 방법도 아니고 현명한 방법도 아니다, 이같은 현상은 지식인이 말하기 쉽고 듣기 편리한 지식을 시로 표현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단지 지식만 아는 시인과 그러한 수준의 평론가들이 추구하던 상업적 공생 관계가 맞물려 수준이 낮은 지식의 시를 양산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한국의 시처럼 지혜를 모르고 쓰는 지식인의 시는 언제나 잔머리를 굴리고 말장난의 수준에서 머무르기 마련이다, 한국의 시처럼 내용이 쉽고 단순하며 이해하기 편리한 시는 주의 깊게 분석하거나 연구할 가치가 없는 관계로 시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고 효과도 반감되어 인식을 흐리게 하고 자각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시는 새로운 지혜가 담겨 있어 우리가 쉽고 간단하며 편하게 알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세계의 시인들은 시를 쓸데 수많은 노력과 고뇌, 자기 성찰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단어 하나에 철저하고 완전한 진리를 담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따라서 세계시는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무한한 진리를 밝히는 정신적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시는 읽는 자에게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은 자세로 시인의 의도를 밝히는 과정을 요구한다, 세계적인 시인들은 각자의 개성이 명확하듯 시의 내용과 테크닉도 크게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자, 그들의 시는 내용이 간단하고 쉽게 보여도 최고의 지혜가 담겨 있고, 시의 내용이 길고 어렵게 보여도 최고의 지혜가 담겨 있다, 세계적인 시는 보다 깊이 헤아리며 다양하게 분석하고 많은 연구를 할수록 인식이 자각할 것도 많은 것이다, 우리는 지혜를 체득해야 하기에 보다 내용이 깊고 어려우며 무한한 진리가 담긴 시들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한 세계시가 인식에 자각이 되고 사고의 발전이 되도록 도와 준다, 그러기에 지혜를 모르는 자는 사고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시를 활용하고, 지혜를 증득한 자는 인식을 닦아 내는 도구로 시를 활용하는 것이다, 세계시는 무한한 자연과 인간의 지혜를 함축하고 있기에 부단한 노력과 이해로 인식의 자각과 변화를 일으키며 사고의 지속성을 따르도록 유도한다, 사실 어떤 세계시는 시 읽기의 과정에서 한번의 호흡이나 단 한번만 생각을 놓쳐도 이해가 연결이 안되어 처음부터 시를 다시 읽어야 할 정도로 집중과 통일을 반복하게 만든다, 세계시는 언제라도 최적의 정신 상태를 유도하는 지혜의 성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시를 배우는 자는 시를 선별하는 과정부터 지혜를 증득한 자에게 시의 가치와 핵심을 분별하는 지도를 받는 것이 현명하다, 왜냐하면 지혜를 증득한 자는 시를 배우는 자에게 적절하고 필요한 때에 지혜의 길로 인도하는 마중물 역활을 할수가 있는 것이다, 선진국의 대학은 시문학을 공부할때 반드시 지혜를 증득한 자가 시의 가치와 핵심을 자각하게 만들어 새로운 지혜의 길로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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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는 어떻게 하는가?
시 쓰기는 시읽기 내용을 역으로 살펴 보면 보다 현명하게 방법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지혜의 경지를 증득하기 전에는 완전한 시를 쓸수가 없기 때문에 꾸준히 연습만 하는 것이 좋다, 세계시를 살펴 보면 한결같이 자신의 벽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 무한하고 자유로우며 영원을 추구한다, 세계 시인들 중에 지혜를 증득하지 못한 자는 단 한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누구라도 지혜를 증득한 후에 시를 쓰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게 된 후에 시 쓰기를 시도해야 세계 수준의 시를 쓸수가 있고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법이다, 오직 그것을 유념하라- 지식만 아는 자는 인성이 발현되지 못한 관계로 가치와 핵심을 분별하지 못한다, 따라서 시를 쓰는 방법으로 인식을 훈련하고 자각하면서 새로운 지혜를 체득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를 중득한 자로부터 냉철한 비교와 분석, 검증과 비판을 받아야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지혜를 체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 읽기를 지혜로 알아야 하듯이 시 쓰기도 지혜로 배워야 냉철하게 자각하고 바르게 성찰하면서 구체적이며 객관적으로 인식에 반영이 된다, 시 읽기가 그러하듯이 시 쓰기도 인식이 분별하면서 사고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시 쓰기를 통하여 인식의 수렴과 확장을 반복해야 사고가 발전하고 지혜가 확장되므로 시를 쓰는 자는 그러한 과정에서 훈련하고 적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지혜의 시적 사고관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시 쓰기도 지혜를 증득한 자로부터 마중물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 쓰기가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담지만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을 담지 못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지혜를 모르고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에게도 도움이 안된다, 지식만 아는 지식인이 시를 써 상업적 발상으로 시집을 내 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를 무지하고 부패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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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정신문화 수준을 살펴 보면 시의 가치와 핵심이 그 나라의 정신문화 수준과 한계를 반영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한국의 부패지수는 객관적으로 볼때 세계 240여개국 중 70위 수준으로 판명된다, 나의 견해로 한국의 시가 세계 240여개국 중 70위 수준으로 평가되는 것은 상관관계가 명확하다, 사실 정신문화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가치와 핵심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국의 시인과 평론가들이 아무리 한국의 시를 고상하게 포장해서 변명을 해도 질과 수준은 그대로 드러나기에 그들은 주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지혜의 눈을 가진 자는 누구라도 의도를 볼수가 있고 가치 평가를 할수가 있는 것이다, 세계시의 수준과 한국시의 수준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가 되면서 시의 가치와 핵심도 간단 명확하게 가름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시는 더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 매우 우려된다, 한국의 시를 살펴 보면 대부분 지식인이 쓴 것으로 이들이 사물과 현상을 보는 수준은 지식과 지혜조차 분별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시인이나 지식인이 세계 시의 수준과 가치를 모른채 혼자만 항아리 속에 도취되어 시를 쓰기 때문에 나타나는 후진적 현상이다, 이들의 시는 대부분 자연 환경을 그대로 옮겨 놓는 내용이거나, 자신의 허세와 가식, 우월감, 또는 혼자만 착하고 고상한 척- 하는 따위가 인식이 습관되어 시로 노출된 것이다, 아직도 그것들이 학생들의 교육환경으로 연결되어 정신문화의 가치와 핵심으로 쓰이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시의 가치와 핵심이 나라의 선도적 역활을 하는 정신적 도구로 혁신과 창조를 주도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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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정보 )
NYT, 대학 문집에 실린 시 2편 소개- 오바마 부상 뒤엔 문학적 재능 있었다”
오바마가 쓴 시집은 미국에서 300만부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NYT는 “오바마는 어떤 정치인보다 잘 쓰여진 이야기의 힘을 아는 인물”이라며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부상한 것은 그의 정치적 경력보다는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학적 재능에 힘 입었다”고 전했다.
그의 "아버지" 라는 제목의 시- 에는
나와 무엇을 하려는가, 애야/ 편안한 삶을 살아/세상의 표피와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면서/’ 라는 부분이 나온다.
설명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에 관한 시는 인터넷에 한 문장만 나와 있어 아쉽지만 여기에 인용한다, 오바마는 젊었을때 시집을 낼 정도로 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찌기 그는 시를 통하여 가치와 핵심을 분별하는 인깃의 발전 과정을 거친 것이다, 오바마에 대한 가치와 인간적 평가는 이러한 시 한문장만 보아도 금방 알수가 있다, 그는 시를 통하여 인식을 훈련하고 사고를 확장시키며 시적 사고관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위의 기사에서 기자가 주장하는 재능에 대한 문제는 다시금 살펴 보아야 한다, 흔히 부모에게 유전자를 물려 받듯이 정신도 재능처럼 물려 받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 특성을 닮은 유전자에 불과할 뿐이다, 정신적인 재능이란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기의 아인쉬타인을 자식이 닮을수 없듯이 오바마의 자식도 부모의 정신을 닮을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닮은 것이 있다면 아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이거나 조건과 환경에 따른 습관일 뿐이다, 위의 시를 보면 아버지의 충고가 오바마의 정서와 가치관에 영향을 준 것을 알수가 있다, "편안한 삶을 살게 되어" 란 부분의 해석이다, 언제나 편안한 삶을 살게 되면 불편한 것을 모르고, 사는 것에 불편한 것을 모르면 오히려 편안한 삶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그같은 습관으로 인식이 면역이 되고 스스로 타성에 빠지게 만든다, 결국 더욱 편한 것만 찾다가 표피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보다 가치 있고 핵심적인 삶조차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식의 타성과 이미지는 끝없이 탐욕을 추구하고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바마는 이러한 인식의 습관을 간파하고 타성적인 삶에서 깨어 있으려고 부단하게 노력한 것이다, 인간은 도덕적 양심과 시적 행위를 통하여 부단하게 노력하고 자각해야 현명한 지혜를 증득한다, 오바마가 백인이 주류를 이루는 정치권에서 극소수에 속하는 이민계 태생인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 갈수 있었던 원동력은 위대한 지혜를 유도하는 시적 사고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선진국의 대통령은 기본적 가치인 인간적 자질과 도덕적 능력을 철저하게 검증을 받는다, 오바마는 시적 사고관의 지혜로부터 객관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지은 앙망성공(仰望星空)이란 시가 7일 시작된 2010년 베이징 대입시험 가오카오(高考)작문 문제의 주제로 출제됐다고 중국 반관영 통신사인 중국신문사가 8일 보도했다.
원자바오 총리의 시는 인터넷에 제목만 나와 있다, 미국의 오바마와 중국의 원자바오 같은 국가 지도자들이 시를 한때의 취미나 호기심 정도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삶에서 시라는 도구를 보다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더구나 이들은 시를 쓰는 차원이 되면서 정신적 가치와 핵심을 추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적 사고관을 지닌 자는 가치와 핵심을 간파하고 있기에 각각을 주도하고 선도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자신을 모르고 인간을 알수가 없듯이 인간을 모르는 자가 정치를 한다는 것은- 수준과 한계가 낮아 저질의 정치를 의도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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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 ( 인터넷 정보 )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 미시시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가난함이 싫어 파출부 일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밀워키로 이사했지만 가난함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9살 때 삼촌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한 뒤로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14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가 몇 개월 만에 죽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게다가 그녀는 마약을 한 경험이 있고 비만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오프라 윈프리는 모든 것을 뛰어 넘어 정신적인 면으로는 어느 대학 총장이나 정치가, 종교적 지도자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한 그녀가 추천하는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오프라 윈프리의 나 자신 되기
"당신은 알고 있나요? 당신은 정말 많이 변했어요. 더욱 더 당신 자신이 되어졌군요." 그건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정말 하도록 하는 것이죠. 더욱 더 우리 자신이 되도록. 그리고 나는 믿어요, 당신이 수행하고 경험한 모든 것들 안에 교훈이 있고, 그 교훈을 통해서 당신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요. 그것은 당신의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죠. 그리고 나를 믿어봐요. 나는 내적 지혜를 얻는 것이 부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더 많이 경험할 수록 당신은 더 얻게 되죠.
조앤 롤링(영국의 작가),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7년 동안 엄청난 실패를 겪었습니다,이혼, 실업자에 가난까지. 하지만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면서 실패가 내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 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일에 쏟을 수 있었습니다. 실패로 인해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실패했지만 나는 분명 살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타이프라이터가 있었고, 무엇보다 지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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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와 조앤 롤링,
알다시피 이들의 발전과 성공은 지능이 높아 똑똑하거나 혹은 배운 지식이 많거나 어쩌다 행운처럼 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삶에서 온갖 좌절과 역경을 겪었다, 슬픔과 고통은 인생의 한때를 지배하였고 우울증은 삶의 바닥을 강요하였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 충동을 겪었다고 하였고, 조앤롤링은 가난에 쪼들린 싱글맘으로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다, 내가 지적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이들이 세계의 어디에서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 살았던 간에 삶에 대응하고 문제에 적응하는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 다르지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살을 결심하기 전에 우울증이 오기 마련이다, 슬픔과 고통으로 절망의 바닥이 다가오면 누구라도 감정이 억눌리고 우울증에서 헤매이게 마련이다, 어떻게든 우울증을 벗어나려고 방법을 찾아 보지만 사막의 늪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 거릴 뿐이다, 이러한 경우 더러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기만 바라는 사람이 있고, 더러는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의 진단을 받고 약물을 처방하지만, 더러는 의지가 한계에 이르러 종교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더러는 우울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소모적이거나 극단적으로 대처하면 우울증이 나아도 자신을 위한 가치가 되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나아진 것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도 더이상 발전의 가치는 기대할수가 없게 된다, 이들은 우울증이 나아도 결코 안심을 할수가 없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만든 우울증은 언제라도 변하기 쉬운 생각을 이전의 상태로 유도하고 재발하도록 현혹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울증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식인은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수가 있다면 우울증은 인식에서 가장 바닥이다, 마지막 방어기재가 작동하는 곳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우울증은 바닥을 확인하도록 준비된 곳이기에 보다 높은 곳이 약속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다 냉철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우울증을 벗어 난다면 자신의 인식을 보다 휙기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꿀수 있는 자리이다, 왜냐하면 가장 낮은 바닥에서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기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을 유념하라- 스스로 인식의 바닥을 확인한 자는 무한하게 높은 그곳까지 올라가게 되지만- 스스로 인식의 바닥을 확인하지 못한 자는 언제나 허우적 거리고 내려가는 길만 확인이 될 뿐이다, 오프라 윈프리와 조앤 롤링은 자신에게 다가온 우울증을 부단한 노력과 용기로 인내하면서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우울증을 현명하게 대응하고 극복하는 자세로 인식의 바닥을 딛고서 마침내 자신을 알고 무한한 지혜까지 증득한 것이다, 이들에게 인과응보의 법칙, 즉 시도하고 대응한 만큼의 노력과 설득력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방송에서 오프라 윈프리가 책을 선별하고 추천하는 이유도 지혜에서 나오는 분별력과 통찰 덕분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우울증을 겪었던 과거가 "부끄러울 게 뭐가 있느냐"며 "나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것을 극복 해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조앤 롤링은 하버드 연설에서 "삶의 밑바닥이 인생을 세울수 있는 가장 단단한 기반" 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의도이다, 왜냐하면 우울증과 같은 삶의 바닥에서 자신의 의지를 신뢰하고 바르게 극복하며 일어서야 비로소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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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정보,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는 최근 심리학자 리자 메초이안은 “똑똑한 여성이 우울증 걸린다”고 그가 쓴 책에서 주장했다,,,이어 예일대 심리학자 수잔 놀른-혹스마의 책 ‘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Women who think too much)’를 인용해,,“여성이 남성보다 무엇이든 더 많이 고민하고 꼼꼼히 따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쉽게 우울증에 걸린다”고 설명했다. 정신 분석학자 놀른 혹스마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이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짐작과 부정적인 추측을 하는 등 과도한 생각을 하는 것을 하나의 병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것은 보다 현명한 주장이 아니다, 인간에게 우울증은 공통된 현상이다, 똑똑하거나 바보이거나 생각이 많거나 적거나 관계가 없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라는 말처럼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예외 없이 겪게 되는 병적인 증상이다, 단지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고통의 깊이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어떤 자는 짧게 어떤 자는 길게 느끼며 어떤 자는 고통이 약하고 어떤 자는 고통을 깊게 느낀다, 그러나 우울증이 바닥에 이르면 느끼는 고통의 정도와 깊이는 같다
인터넷 정보를 뒤져 보니 위대한 사람들 중에 우울증이 걸린 사람들이 수없이 나온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버지니아 울프, 미식축구 선수 라이오넬 엘드리지,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 오페라 가수 이탈리아의 게타노 도니제티,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세계적 문호 레프 톨스토이, 불세출의 소련 남성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 영국의 시인 존 키츠,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만유인력의 아이작 뉴턴,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 천재적인 과학자이며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영국의 명재상 윈스턴 처칠, 영화배우 비비안 리, 미국의 야구선수 지미 피어설, 최연소 오스카상 수상 배우 패티 듀크,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찰스 디킨스. 기타 등등 모두 열거를 할수 없을 정도이다, 대부분은 자신이 감추었던 우울증이 우연하게 드러났거나 오랜 고통을 못견디고 스스로 고백한 경우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이 고통스러운 병을 피하고 싶다."고 한 빈센트 반고흐,,"내가 이 병에 걸린 건 정말 내 잘못이 아니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수 많은 다른 사람들 생각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의 한 부분이다. 윈스턴 처칠은 불안한 억제형 우울감에서 탈출하기 위해 유화를 그렸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my black dog (나의 검은 개)"라고 하였다.
처칠은 유화를 그리면서 검은 개가 사라져 가기를 기다렸다. 또, 미국의 소설가 호손은 우울증으로 12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버렸다. 무슨 일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나 자신을 감옥 안에 감금해 버렸다. 이곳에서 나 자신을 꺼내 줄 열쇠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절망적이었던 호손은 우울증이 호전된 후 계속해서 걸작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우울증으로 인하여 오랜 동안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그러나 우울증을 극복한 뒤에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획기적이고 창조적으로 높이는 발전의 도구가 되었다, 이들은 우울증을 극복하는 현명한 자세로 부단하게 노력하고 인내하면서 명료한 그길을 따라 갔으며 마침내 지혜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뽑은 링컨의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저명한 역사가 조슈아 울프 쉥크는 링컨의 우울증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링컨의 우울증은 가벼운 역사의 에피소드로 취급 됐을 뿐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과 어린 나이에 여읜 어머니에 대한 연민,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심리학적 분석이 대세를 이뤘다. 쉥크는 우울증이야말로 링컨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링컨의 우울증은 매우 심각해 실제 26세 때와 32세 때에는 거의 자살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며 "링컨은 (우울증 환자)의 참담함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했다"고 지적했다. 쉥크는 "바로 이 노력이 그를 빈농의 아들에서 변호사, 국회의원, 그리고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美 역대 대통령 절반이 우울증이 걸렸다고 고백하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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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연합뉴스) 김현 통신원 =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전 미국 대통령이 시(詩)를 좋아하고 또 시를 직접 쓰고 싶어하는 열망이 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새로운 문건이 확인됐다.
"링컨은 시 애호가"..우연히 드러난 새 면모
옛 저택의 벽서 발견된 편지 작성 주인공 확인으로 드러나!
4일(현지시간) 시카고 언론에 따르면 링컨 대통령 기념도서관 측은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에 있는 링컨 대통령의 집 내벽에서 발견된 167년 전 편지의 작성자를 마침내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편지는 1987년 링컨 대통령의 집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할 당시 부엌 한쪽의 쥐구멍에서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인부들에게 발견됐다. 링컨이 1844년부터 1861년까지 17년동안 살았던 이 집은 링컨이 생애 유일하게 소유했던 집이기도 하다. 링컨은 존스턴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1846년 2월 25일 시를 써보냈다. 존스턴은 이 시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퀸시 휘그에 게재했다. 링컨이 유년시절 살던 인디애나주 남부의 집을 찾아가 추억을 회상하는 다시 찾은 내 어릴적 집 (My Childhood-Home I See Again)과 링컨 친구의 이름을 딴 매튜 젠트리(Matthew Gentry)가 바로 그 시다. 이번에 확인된 1846년 3월 10일자 소인 편지는 존스턴이 링컨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보낸 것으로 "이 시를 직접 썼느냐"는 질문이 포함돼 있다. 링컨은 4월 18일 존스턴에게 답장을 하면서 "직접 쓴 건 아니다. 만일 내가 내 생각대로 이렇게 멋진 시를 쓸 수 있다면 내 재산 전부를 걸겠다"며 누군가에 의해 대필된 사실을 고백했다. "이번 확인은 편지 필자를 찾았다는 점 이외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링컨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며 "링컨이 시를 좋아했고 직접 시를 쓰고 싶어했으며 이를 위해 노력했다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스토웰은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문서들은 대부분 소각되고 남아있지 않다"면서 "이 편지는 어떤 이유에서건 벽 안으로 들어가 있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기타기사참조 201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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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열거한 저들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더러는 우울증의 바닥에서 주저 앉았거나, 이들 중 더러는 스스로 일어서는 방법을 선택하였고, 더러는 막연한 종교를 찾아 신의 기적을 원하였고, 더러는 인성을 발현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일단 우울증을 겪는다는 상태는 자신을 모르고 지혜를 모른다는 반증이다, 이들은 아무리 명성이 있고 똑똑해도 지식만 배운 지식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똑똑한 것과 현명한 것은 전혀 별개의 성질이다. 그것은 암흑과 광명의 삶으로 비교가 될 정도로 간극히 나타난다, 내가 인터넷 정보로 이들을 열거한 숫자보다 안밝힌 숫자가 많다는 것을 주목하면 인간에게 우울증은 공통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할수가 있다, 따라서 프로이드는 인간은 누구나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아인쉬타인은 인간의 미래는 마음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프로이드와 아인쉬타인의 문제 인식은 같은 곳에서 출발하여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우울증의 바닥에서 자신의 내면을 딛고 스스로 일어선 자들은 새로운 차원의 정신 세계인 지혜로 들어가게 된다, 누구라도 그곳에 도달하면 알게 되리니- 자신의 가치와 핵심을 현명하게 관장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위대한 지혜라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반전의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
다시금 강조한다, 위에서 열거한 자들의 공통된 점은? 우울증으로 인하여 삶의 바닥을 강요 당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외부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부단하게 인내하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냉철하게 정신 세계를 헤아리고 가치와 핵심을 추구하는 시적 사고관의 지혜를 증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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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확장에 대하여
사실 나는 사십세가 되기까지 책을 가까이 하거나 읽어 본 적이 없다, 애초부터 책은 내용을 어렵게 생각하고 부담이 생겨서 흥미도 호기심도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세계시 한문장을 읽고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오랜동안 한권의 시집을 헤아리며 분석하고 집중하면서 새로운 지혜를 체득한 것이다, 이후에 오십 여권의 세계 시집과 한권의 철학서를 읽어 보았다, 그러나 시집 한권 읽기가 끝난 이후부터 그러한 책들은 더이상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나중에 읽은 오십 여권의 시집과 한권의 철학서는 내가 아는 것을 다시금 검증하고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가치와 핵심을 보는 방법이 같았으며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도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지혜를 통찰하는 기본적인 원리와 방법이 같았던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읽은 50여권의 시집과 철학서는 나의 사고가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무한하게 확장된 것을 다시금 검증하고 확인하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처음부터 주의를 주었듯이 그러한 결과조차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즉 세계시를 통하여 지혜를 증득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으로 아직도 반의 과정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실로 나머지 반의 과정이 중요한 것은 이후에 내가 지혜를 증득하고 알았다, 그것도 모르고 가던 길을 멈추고 우월감에 도취하여 우쭐-거렸다면? 나는 얼마나 창피를 당하고 몸둘바를 모르게 되었을까?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아찔하고 등골이 서늘할 정도이다, 아직도 나는 어두운 생각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보다 자세히 설명을 하겠다, 일단 세계시를 예)로 들으며 인식의 확장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 간다, 인용한 세계 시집은 집에 있던 것으로 니체의 시 ( 민음사 ) 헤르만 해세 ( 나나 ) 노벨문학상의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문학 동네 ) 오쇼라즈니쉬 배꼽, ( 예지원) 등이다, 지면상 짧은 시만 몇가지 예) 로 들고 설명을 붙인다,
참고
시는 지식으로 보는 방법과 지혜로 보는 방법이 있다,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시를 이해하며 보는 방법이 있고, 자신의 증득한 지혜를 통하여 시를 이해하며 보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지식만 아는 자가 자신이 아는 범위와 한계에서 보기 때문에 시의 가치와 핵심도 지식으로 제한이 되고 한계의 이해로 머문다, 대부분의 한국시와 시인들, 평론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후자는 지혜를 증득한 자가 지식과 지혜를 활용하며 시의 가치와 핵심을 무한하게 이해한다, 세계시와 세계적인 시인들 세계적인 평론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여기서 우리가 보다 주의할 점은 지식만 배운자는 단지 자신이 아는 지식의 범위에서 한가지 방법으로 시를 보고- 지혜를 증득한 자는 지식과 지혜 두가지 방법을 활용하며- 시를 비교하고 분석하며 평가할수가 있는 것에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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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행을 떠나 보자!
( 니체 )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
돌아가지도 않겠는가, 올라가지도 않겠는가.
영양이 다니는 길도 없는가,
그렇게 나는 여기에 기다리고 있다,,
눈으로 보고 손에 잡히는 것일랑 꽉 붙들고
다섯 자 넓이와 아침 노을,
그리고 발아래 세계와 인간과 그리고 죽음!
해설
이 시를 읽어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너무 간단해서 이해하기 쉬운가? 혹은 무슨 내용인지 어려워서 모르는가? 이 시를 보면 누구라도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을 하는 나그네를 떠 올리거나? 삶의 바닥으로 내 몰린 나그네의 서글픈 심정을 생각하지 않은가? 물론 시를 읽는자가 그러한 생각, 또는 사진이나 조각, 그림 한폭을 떠 올려도 무방하다, 누구라도 이러한 시를 읽으면 자신이 아는 지식의 범위와 한계에서 이해하게 마련이다, 즉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자신이 아는 것보다 가치와 핵심을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 시는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일단 설명을 읽고 그것은 천천히 한번 더 생각을 해보기로 하자, 시를 볼때는 단어 하나마다 왜? 어떻게? 무엇이? 란 질문을 끝임없이 던지고 보다 냉철하고 집요하게 의도를 파악하면서? 시인이 의도한 가치와 핵심에 집중해야 한다, 시를 이해할때 시인의 의도를 99%를 알고 1% 몰라도 시를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현상이 지식만 배운 자와 지혜를 증득한 자의 차이다,
이 시는 한국의 시인들이나 문학 평론가, 또는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가 보아도 간단하게 읽은 것 이상은 얻어 낼 것이 없다, 그들은 언어라는 지식은 알아도 언어를 깨우친 새로운 지혜를 모른다. 그들의 인식은 이 시를 읽는 순간의 아는 것으로 그칠뿐 더이상 이해를 넓히거나 생각할 것이 없게 된다, 그들에게 a는 a라는 것을 배운 지식으로 알아도 a가 무한하게 될수 있다는 지혜를 배운 적이 없다, 그들은 지식과 상식만 배웠고 앵무새처럼 그것만 되뇌이고 가르칠뿐이다, 자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에서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한 스티브잡스, 그는 이 시를 어떻게 보게 될까? 그는 자신이 "필터가 없는 사람" 이라고 말하였다, 척보면 안다, 물론 a에서 무한을 포함하고 그중에 핵심을 알게 된다, 그는 지혜를 증득한 자로 주장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시를 읽어 가면서 시인의 내면과 일체를 이루며 시의 가치와 핵심을 간파한다, 그의 인식은 지혜로부터 나오는 통찰과 직관이 준비되어 다시금 헤아리고 반복하는 이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척보면 아는 것이다, 일반인과 다른 지혜의 사고를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브잡스가 그렇게 대단한가? 그것은 아니다, 그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보다 먼저 지혜를 증득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시에 대한 설명을 아주 짧게 할수도 있지만- 일단 보다 많은 예)를 들어 충분하게 이해가 가도록 설명을 하겠다, 이러한 예) 를 드는 것은 그대들이 이러한 시를 스스로 이해하고 분석하며 평가할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주의ㅡ
그리하여 주목하라- 나는 이러한 시를 통하여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시로부터 다양한 분석과 이해에 몰두하면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과 편견, 고정관념이 희석이 되면서 인식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처럼 시로부터 보다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다양하게 분석하며 인식하는 과정이 있어야 사고가 수렴과 확장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지혜로 전환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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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설명
위의 시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니체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 즉 우울증을 겪는 것을 표현한 시이다, 이처럼 시를 짧게 설명할수도 있다,
그리고 보다 자세히 설명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시를 도구로 보다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시를 보고 더이상 읽을 것이 없는가? 혹은 어디에서 이해가 멈추었다면? 한번 더 천천히 헤아려 보라, 그러면 처음 보던 이해와 달라 질수가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처럼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한발씩 헤아리고 나아가다 보면- 서서히 인식이 지혜로 전환되어 간다, 먼저 시의 제목인 "나그네"를 살펴 보면? 혼자서 방황하며 헤매이는 상태를 말한다, "그의 그림자"란 혼자된 나그네의 슬픔과 외로움이 감정의 무게로 이어진- 즉 감정이 그림자가 되어 무게로 눌리어 꼼짝할수가 없는 상태이다, 그곳까지 이해가 나아갈수 있다면 나그네가 우울증이란 현상을 겪는 것을 간파할수 있다, 그렇게 의도를 헤아리고 집중하다 보면 시를 지혜의 도구로 인식하기가 편하고 이해를 넓히는데 도움이 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해가 되면 니체가 시의 제목으로 사용한 나그네란 의미와 그의 그림자라는 의미도 쉽게 알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한번 더 헤아리고 생각해야 한다는 이유를 느낄 것이다,
참고로
니체는 인문학의 3대 거봉이라고 불린다, 나의 견해로 니체는 인문학의 최고봉이고 판단한다, 사실 우리는 그의 철학보다 시에 주목해야 한다, 니체는 어려서부터 천재라고 불리었고 지식이 출중하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점이다, 니체가 어려서 총명하고 천재였다는 말은 똑똑한 기능 즉 지능( IQ )이 높아서 많은 지식을 알고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아무리 총명하고 똑똑한 천재라고 하여도 단지 지식만 알아서 박학다식할 뿐이다, 지혜의 경지에서 보는 니체는 오직 지식만 알고 지혜를 모르기에 즉 "자신도 모르는 자! 한마디로 정리가 된다, 그는 독일에서 20대 후반에 대학 교수를 지냈다, 하지만 니체의 인식은 완전하고 독립적이며 무한한 가치로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니체의 우울증은 대학 교수일때 온 것이 아니고 이후에 겪은 것이다, 이처럼 우울증은 예외가 없다, 누구라도 자신을 아는 지혜를 모르면 우울증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니체에게 우울증이 왔을때는 가장 괴롭고 견디기 힘든 시기였지만, 이 시를 쓸때는 지혜를 증득하고 최고의 경지에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지나면서 새롭게 인식을 자각해야 비로소 지난 것을 보듬어 주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란 돌아 보는 것조차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거부하지 않던가! 니체가 우울증의 과정을 시로 쓴다는 자체는 그가 우울증을 겪던 시기를 지나서 자신의 경험을 보다 인간적이고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니체에 대하여 오해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으니 주의하자! 니체의 긍정이란 이미지는 좋은 것이 좋다는 긍정이 아니라- 반드시 설득력이 있는 긍정이다,
(39)
제목의 이해 ㅡ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
시의 제목에서 니체는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라는 표현을 하였다, 여기서 니체가 의도한 나그네란 일반적인 나그네이다, 그러나 본래 니체가 알고 있는 나그네의 가치로 분석하고 설명하려면 시간이 모자란다, 지면상 짧게 간추린다,
본래 니체가 인식하는 나그네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름에 달 가듯이 유유자적하는 나그네이거나 삶의 허무를 느끼고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다, 그는 이미 시적 사고관을 지닌 지혜의 경지에 있었기에, 자신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자유하는 즉ㅡ 인간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자를 나그네로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아는 나그네는 보다 현명하고 완전하게 독립적인 가치로 홀로 선 자를 뜻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그네와 니체가 생각하는 나그네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아직 그러한 의도를 나타낸 것은 아니므로 더 읽어가며 헤아려 보기로 한다, 다시 말해서 시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뜻이다, 시는 의심 할수 있는 만큼 모두 하고- 질문은 할수 있는 만큼 많이 하며- 가정은 할수있는 만큼 많이 하는 것이- 자신의 인식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그네에서 "그의 그림자" 라는 표현은 어떠한가? 우리가 아는 지식의 범위에서 생각하면 "그의 그림자" 란 태양이나 달빛에 비치는 나그네의 그림자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이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나그네의 그림자로 생각하는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지식이고 상식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그림자에 대한 어떠한 의도나 정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이해가 멈추면 우리가 인식의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ㅡ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가 시의 제목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ㅡ
따라서 니체가 나그네에서 "그의 그림자"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시적이고 철학적인 가치가 담겨 있다, 니체가 생각하는 나그네에서 "그의 그림자란 생각하는 나그네의 느낌과 어두운 감정을 그림자로 표현 한 것이다, 그가 정신적 부작용인 우울증을 "생각의 그림자"로 선택한 것은 그가 언어ㅡ 즉 말의 가치를 얼마나 정확하게 선택하고 사용하는지 알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자"란 우울증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니체가 언어를 깨우쳐 인간적 가치를 통찰하고 지혜의 경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시의 내용을 이해하고 결론까지 도달하면 나그네의 그림자는 우울증의 막다른 길에서 꼼짝을 못하고 견디고 있는 상태이다, 이 시는 니체의 "우울증이 걸린 사람" 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의 조각으로, 뭉크의 "절규" 라는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위대한 작품이란 위대한 지혜로부터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가 시적 사고관의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면 자신을 모르고 위대한 가치를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세계적인 지성의 길도 알수가 없다, 위대한 지혜를 모르면 세계적인 시와 철학, 예술, 인문학의 어떤 가치와 핵심도 아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것은 시적 사고관에서 창조되고 이해되고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가치와 핵심을 창조하는 선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지혜를 증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의 그것들은 언제나 최고의 상태에서 만들어지고 창조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니체가 이 시를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지만, 세계적 시인들, 철학자, 예술가들은 모두 현재가 압축된 사고를 지닌 초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은 모두 현재형으로 생각하고 행위를 하며 작품을 만든다는 것도 유념하자,
돌아가지도 않겠는가, 올라가지도 않겠는가.
그렇게 넓고 자유로운 길에서 꼼짝도 할수 없는 상태, 생각이 발이 묶인 것이다, 끝없는 무기력과 절망의 고통을 혼자서 견디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게 되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아래로도, 위로도, 내려갈수도, 올라 갈수도 없는 상태에서, 니체는 돌아가지도 않고 올라가지도 않겠는가, 라는 표현으로 묶어 한번에 정리하였다, 우울증-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찾아 오고 무기력한 슬픔과 고통이 지루하게 반복되기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영양이 다니던 길도 없는가,
우리는 높은 산이나 절벽같은 협곡을 마치 들판처럼 자유롭게 달리는 영양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양처럼 언제나 생각하던 길로 습관처럼 다녔지만 지금은 그길이 어디인지 언제 그길을 다녔는지 알수도 없고 기억조차 없다, 생각하는 길이 과거에 지상의 낙원이었지만 지금은 천길같은 낭떠러지가 되어 있다, 세상 어디에도 길이 있지만 생각의 길은 막혀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헤아려 보라- 생각이란 얼마나 자유로우며 무한하고 창조적인지- 도대체 무엇인들 못하고 어디인들 못가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사방의 벽에 막혀 한발짝도 움직 일수가 없는 상태이다- 즉 우울증이 걸린 상태가 되었다, 니체는 그것을 산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영양이 다니던 길도 없는 것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여기에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생각하는 방법이 묶인 것처럼 어떤 생각도 말도 행위도 할수 없는 무기력하고 지루한 고통의 상태를 견디면서 오직 시간이 지나 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ㅡ 아무런 약속도 목적도 기대도 없이 오직 절망의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려야 하는 심정은 결코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그렇게 나는 숨을 죽이며 시간이 지나 가기만 기다리고 있다,,
눈으로 보고 손에 잡히는 것일랑 꽉 붙들고
눈에 보이는 외부에 것을 활용 할수가 있다면? 어떤 것이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할 것인가! 하지만 자신의 생각조차 마음대로 못하니 아무 것도 할수가 없다, 우울증- 그곳에 묶여 있으면 아무런 대책도 못쓰고 당하게 된다, 내 안의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수 없는데,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고 위안을 받으며 구원을 기대 할 것인가! 차라리 물에 뜬 지푸라기라도 잡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잡아 꽉 불들고 단 한발이라도 벗어 날수가 있을텐데,,,
다섯 자 넓이와 아침 노을,
이전에 세상은 언제나 파아란 하늘처럼 무한하고 자유롭게 보였는데 지금은 온통 무거운 고통과 지루함과 지쳐 겨우 다섯자 넓이처럼 작아 보인다, 우울증을 겪는 자신을 다섯자 넓이의 세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으면 아무리 좋은 충고나 위안도 귀에 들어 오지 않게 마련이다, 실로 주의해야 하리라ㅡ 인간의 깊이를 모르고 손을 내미는 얕은 말이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 온다, 이처럼 고통을 겪는데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만한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슬픔과 고통 뿐인데 빚나는 아침 노을이란ㅡ 더욱 가슴을 찢어지게 할 뿐이다, 아침의 노을조차 기꺼이 맞이 할수가 없는 무기력과 자괴감이 자신을 끝없는 고통과 절망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발아래 세계와 인간과 그리고 죽음!
눈에 들어오는 외부의 세계보다- 다루기 힘든 것이 내안의 세계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구속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스스로 다섯자 감옥에 갇히고 만 것이다, 어제는 희망이던 세상이 오늘은 절망의 늪으로 끌고가며 삶의 의지와 자존감을 희석시키니- 겨우 다섯자 넓이의 발 아래 작은 세계란! 감정의 무게가 죽음의 골을 타고 땅으로 내려갈 뿐이다, 자신을 유혹하는 생각이란 온통 발아래 지하의 세계- 더이상 버틸 생각도 의지도 없는 인간이여! 차라리 죽음을!,,,
이정도 설명으로
그대가 이 시를 충분히 이해하고 조금 더 알수가 있다면 처음에 자신이 지식으로 본 것의 이해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자- 이제 그대는 스스로 시의 가치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언제라도 시 읽기에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고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다시 강조하면 한국의 시는 지식인이 시를 쓰기 때문에 내용도 간단하고 철학적 이해도 없으며 무엇보다 지혜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인식의 분별력이 떨어져 언어조차 냉철하게 가려내지 못한다, 따라서 한편의 시를 읽어도 세계시를 추천하는 바이다, 누구라도 항아리 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고 세계적인 작품과 부딛치고 그것과 어울려야 새로운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40)
참고ㅡ
나의 설명을 읽고 시를 보니 어떠한가? 세계시란 아무리 내용이 간단해도 지혜가 담겨 있으며 무한한 가치로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처음에 그대는 이 시를 자신이 아는 지식의 관점에서 보았지만, 시는 지혜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시를 분석하고 헤아릴때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게 분별하고 다양하게 자각하기 위하여 부단하게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시읽기에서 진도는 고려할 필요가 없고 보다 중요하지도 않다, 누구라도 시간은 충분하다, 언제라도 한번 더 세밀하고 집요하게 시의 가치와 핵심에 집중하며 이해를 넓히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 시인의 의도에 다가서려고 노력을 해야 그들과 같은 인식으로 사고가 확장되며 위대한 지혜의 경지로 다가 갈수가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란 성질은 이해가 가능하고 무한하게 연결될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 즉 자신의 인식을 확장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우리가 시에서 한번 더-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하고 헤아리는 부단한 인내와 노력이 인식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라고 판단하고 고리타분하게 넘길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더- 그리고 조금 더 헤아리고 분별하는 방법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과 미래를 좌우한다면, 그리하여 조금 더 넓게 깊게 높게 사고를 확장하는 끝에서 무한한 자유와 혁신, 창조를 추구하는 지혜의 경지로 인도하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져야 하지 않은가! 척 보면 알게 되는 지혜란 그렇게 쉽고 가볍게 증득 할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면상 내가 이처럼 길게 설명한 것은 한번의 예)로 족하다,
(41)
( 니체 )
R 바그너 -
사슬에 고통 받는 그대,
평화도 자유도 빼앗긴 정신이여,
언제나 의연하면서 그래도 구속받는 정신이여,
점차 미움을 받아 발가벗겨진 정신이여,
마침내 그대는 향유가 든 독배를 들었다,
아, 그대도 십자가 곁에 쓰러졌다,
그대도 아 그대도--정복을 당하였는가!
오랫동안 나는 이 굿을 보고 섰다,,
전옥과 내음, 비통과 원한과 죽음의 내음 사이로
그 사이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향연과 교회의 내음
그것은 서먹서먹하고 몸서리 처진다,
춤추며 나는 어릿광대의 모자를 하늘에 던진다,
나는 빠져 나왔으니까!
설명
이 시는 니체가 R.바그너를 향하여 쓴 시이다, R 바그너가 우울증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종교를 찾고 신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러한 과정을 겪어서 이미 알고 있다는 의도로 쓴 시이다, 시의 시작 부분에 니체가 R바그너에게 "사슬에 고통받는 그대" 란? R 바그너가 스스로 생각의 사슬을 만들며 자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울증에 고통받는 상태로 해석하면 된다, 중간 부분의 "오랫동안 나는 이 굿을 보고 섰다" 란? 니체도 R바그너처럼 인식의 바닥에서 해매이던 지루한 고통이 오래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가 니체처럼 우울증의 고통과 정신적 압박을 경험하지 않고는 이러한 느낌을 표현하기 조차 어렵다, 오직 우울증을 당해보고야 그것이 절박하고 위험하지 그지없는 정신 상태라는 것을 알고 이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니체가 오랜동안 인내와 노력으로 견디던 우울증을 한으로 표현하고 있고, 그것은 굿처럼 풀어내야 할만큼 심각했다는 반증이다, 니체가 자신을 아는 지혜의 경지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R 바그너에게 벌어지는 그러한 현상을 마치 손바닥 안처럼 꿰뚫어 보고 "오랫동안 나는 이 굿을 보고 섰다"고 표현한 것이다, 시의 끝 부분에서 "나는 빠져 나왔으니까" 라는 표현은? 니체가 우울증에서 해방이 된 것을 의미한다, 누구라도 인간의 의지를 극단적으로 시험하는 우울증에 걸리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참게 되거나, 무기력하게 시간만 가기를 기다리거나, 의지를 포기하고 신을 선택하던가,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니체는 삶에서 겪을수 밖에 없는 우울증을 인간적 경험과 과정의 하나로 받아 들이고, 보다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로 현명하고 지혜롭게 빠져 나온 것을 의미한다, 그는 스스로 인식의 바닥을 딛고서 지혜의 하늘까지 보게 된 것이다,
(42)
니체
가장 고운 육신은----- 베일일 뿐 -
그 속에 수줍어하며....보다 아름다운 것이 감추어져있다,,
설명
인간에게 보다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인 마음에 있다, 우리의 육신이 가장 고우며 아름답다고 하여도 그것은 마음을 싸고 있는 베일일 뿐이다, 사실 이 시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내용을 표현한 것보다 더 깊은 의도가 들어 있다, 누구라도 자신이 알던 지식의 가치에서 지혜의 가치로 바꾸어야 내면에 감추어진 소중하고 아름다운 보물을- 알게 된다는 뜻이 숨겨진 것이다, 즉 니체가 자신처럼 내면을 관조하는 지혜의 눈(마음의 눈)이 있어야 그렇게 볼수 있다고 의도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지혜라는 내 안의 보물을 찾아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니체가 하는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는 말과 의도가 같은 것으로 보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어릴때부터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하고 지식이 출중하여 겨우 20대에 대학교수가 된 이때가 비로소 지혜를 증득하고 지식보다 지혜가 상위개념이란 것을 간파하고 그것은 진리라고 판단한 지점이다, 인간에게 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내면의 지혜로 숨겨져 있는 것을- 니체가 지혜의 경지에 올라 자신의 내면을 확인하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자신에게 잠재하는 위대한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밖인 외부의 환경과 분위기를 찾거나 군중과 대세라는 무리에 휩쓸리지 말라, 또한 막연하게 종교를 찾고 신에게 매달리지 말라ㅡ왜냐하면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ㅡ지혜의 경지로 가는 길은 자신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보물처럼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43)
( 니체 )
나는 오직-
말을 만드는 사람
말이 전부다,
내가 전부다,
( 설명)
말은 독립적이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기호, 숫자, 고유명사 등,이 있고 가치와 핵심을 보조하고 이미지를 형성하는 형용사,부사, 동사, 등,이 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완전한 단어와 불완전한 이미지로 구성이 되므로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말이란 정서와 가치관을 형성하고 소통하는 도구이기에 무엇보다 의도를 바르게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말이라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살아가는 반면에 스스로 어렵고 불편하며 불완전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줄도 모르고 살아 간다, 세월이 가고 늙어 갈수록 공통된 현상으로 나타나는 우울증과 치매라는 정신적 질환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러한 현상은 말이라는 지식적 습관과 이미지가 고정 관념화 될수록 인식의 틀에 갇히게 유도하니까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각종 부작용과 후유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드는 "인간은 누구나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 고 주장하였고, 아인쉬타인은 "인간의 미래는 마음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가 이들의 의도를 바르게 간파할수 있다면 말이라는 언어와 습관에서 보다 냉철하게 헤아리고 다양하게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각자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을 배워서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를 헤아리고 분별하면서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말로부터 습관된 인식을 다양하게 헤아리고 분별하는 지혜를 체득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지식의 과정 뒤에는 완전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으로 유도하는 지혜의 과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과정이 아니라 필연적인 과정이다, 인간은 지혜를 체득해야 비로소 자신을 완성으로 유도하고 무한한 세계를 추구하며 자유의 영원성을 담보하게 된다, 우리가 자유롭고 완전하며 독립적인 인간이 되려면 반드시 자신이 알고 있는 말의 의미를 헤아리고 인식을 자각하며 새로운 지혜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말이라는 지식적 습관과 추상적 이미지가 지금까지 자신의 정신을 휘둘리게 하였던 사실을 알아 채고 부단하게 노력한 끝에 말이 지배하던 인식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위대한 지혜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니체가 말이란 지식과 이미지를 배우고 알았을때 그것은 자신을 다루었지만 말이 지니는 성질과 습관적 타성을 깨우치고 새로운 지혜로 완성이 되면서 비로소 자유롭고 완전하며 독창적인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니체가 지혜를 증득하고 자신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생각을 다루면서 비로소 말을 다루게 되었다, 그는 시의 전부가 된 것이다,
우리도 위대한 지혜를 체득하여 보자! 가장 좋은 방법은 지혜의 끝에 도달하는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나는 세계시를 약 1년ㅡ시도하는 과정이 있었고 결과를 검증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2년ㅡ 총 3년 정도가 걸렸다, 물론 지혜를 증득하는 기간이 빠르다고 좋을 것도 없지만- 느리다고 현명한 것도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전에 나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현실에 적응하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 함께 가 볼까나?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해탈의 세계ㅡ 시인의 나라이다!
참고ㅡ
내 글은 지혜와 연관이 되어 더러 불교에서 주장하는 해탈과 비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로 인하여 특정 종교인 불교를 폄훼하고 싶지가 않다, 오히려 종교와 비종교를 위한 소통과 보완, 협력과 발전으로 이해가 되길 기대한다, 사실 나는 불교와 가장 인연이 깊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내 초등학교 1학년때 이름은 최재억, 그때 바꾸어 놓은 이름이 "최재왕"이고 내 이름을 바꾸어 준 사람은 스님이다, 길가다 우리집을 들른 스님이 내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때 바꾼 이름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ㅡ뿐만 아니다, 내가 시를 통하여 지혜를 증득하고도 그것을 모르고 지냈는데 종교 tv에서 붓다가 말하는 것을 보고 ㅡ비로소 내가 지혜를 증득한 것을 알았으니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의 글로 불교계가 원망하거나 비하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붓다를 위대한 시인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신도와 비신도와 동등하게 존중한다, 우리는 깨달음의 목표는 같지만 추구하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또 한가지 덛 붙이자면 나는 종교가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대략 60대까지 깨달음을 통하여 지혜의 자신을 알지 못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다, 노년에 이르러서 심심은 쇠약한데 급격하게 무너지는 정신 건강을 어떻게 하겠는가! 오히려 종교라도 찾고 신을 믿고 의지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 단 그렇다 하더라도 종교지도자는 반드시 자신을 아는 지혜를 증득한 자격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나는 무신론과 유신론을 적절하고 현명하게 받아 들일 뿐으로 나에게 쓸데없는 종교적 오해나 착각이 없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 글을 시작한지도 벌써 10년이 되어 간다, 이미 지혜로 다 알고 있어도 지능이 떨어지니 글의 질서가 문제가 된다, 수만번을 고치지만 개의치 않는다, 지혜는 낙수물로 바위를 뚫는 것처럼 인내와 노력이라는 도구를 현명하게 사용한다, 여하튼 직업상 하는 일은 바쁘고, 빌어먹을 정치가 신경이 쓰이니- 그곳에 시간을 뺏기고 있다, 지난 대선 안철수의 대권을 문재인과 패거리가 도둑질 하는 바람에 - 다시금 쓸데없는 시간을 그곳에 낭비하다니!,,,깨달은 자의 업보이다, 과연 내가 사라지기 전에? 이 글이 끝날지 모르겠다, 내 지능이 보통만 되었어도 진작에 끝났을텐데 ,,,그것만 조금 아쉽다.
진행중 ㅡ
.
(( 3 )) 인간의 미래
*프로이드 : 인간은 누구나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
*아인쉬타인 : 인간의 미래는 마음에 있다,
*최재왕 : 인간은 지혜를 증득하면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고 우울증과 치매까지 예방된다,
( 쇼팬하우어 )
모든 진리는 세 단계를 거친다.
All truth passes through three stages. First, it is ridiculed. Second, it is violently opposed. Third, it is accepted as being self-evident - 모든 진리는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 조롱당하고, 두 번째 심한 반대에 부딪히고, 세 번째 자명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1)
이 글은 세계 최초로 주장하고 있다, 이 글의 설득력과 신뢰를 위하여 약간의 세계시와 기사, 인터넷 내용을 참고한다, 나는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을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으로 설명하였다, 내가 제시한 방법을 활용하면-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부터 증득하는 결과까지 혼자서 검증하며 나아갈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지혜를 증득해서 현명하고 자유로우며 무한하게 사고해야 한다, 또한 극단의 고통과 부작용을 야기하는 우울증과 치매까지 예방해야 한다,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면 깊은 잠에 빠질수가 없고 진정한 행복을 알수도 없으며 마음의 안식처로 들어 갈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불균형적이고 불완전하며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 글은 지혜의 시작이자 끝이며 처음이자 마지막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시간이 날때마다 헤아려서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기 바란다, 이 글로 지혜를 증득한 자는 자신들이 겪은 경험을 각자의 개성과 방법으로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혜를 증득한 자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왜냐하면 지혜를 증득한다는 것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 즉 인간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글을 통하여 지혜를 증득하면- 세계의 시인들과 철학자, 4대 성인이라는 붓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의 정신 세계를 그냥- 알게 된다, 이 글 하나로 그들의 내면과 가치를 모조리 알게 되는 것이다,
2)
붓다의 시와 게오르게의 시ㅡ
이 시는 불교의 창시자 붓다의 시와 독일의 시인 게오르게의 시이다, 이 시들은 외부의 현상이나 남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나타나는 생각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단지 생각을 하고 느낄뿐 그것을 볼수가 없기에 습관의 타성에 끌려 다닌다, 더구나 생각이란 추상적 이미지로 난해하기 그지없는 성질이기에 그것의 주인인 자신조차 마음대로 다룰수가 없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인간은 지혜를 증득하면 이른바 "마음의 눈"이라는 지혜가 생기고 그것이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한다, 즉 지혜가 통찰과 직관을 장착하고 타성을 헤아리며 현명함을 조절하는 것, 1)은 지혜를 증득한 붓다가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인식의 본질을 표현하였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다 보면 무한하고 자유로우며 영원한 지혜를 증득한다는 역설적인 설명이다, 2)의 시는 지혜를 증득한 게오르게가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인식의 본질을 표현하였다, 언제나 상냥한 아침처럼 싱그럽고 청정하며 자유로운 생각을 너라고 표현한 것, 1)과 2) 는 감정에 차이가 있지만 언어의 표현은 선택 사양일 뿐이다, 1) 은 붓다가 감정을 배제시킨 것이며 2)는 게오르게가 감정을 포함시킨 것, 지혜를 증득하면 인식은 평화롭고 향기가 나는 법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간단 명확하다. 첫번째, 붓다와 게오르게처럼 지혜의 정신 세계가 있다는 것! 두번째, 그러한 정신 세계로 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 세번째, 그러한 정신 세계로 가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3)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ㅡ 석가모니 붓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너는 날렵하고 청순하여 ㅡ 게오르게 시인
너는 날렵하고 청순하여 불꽃 같고
너는 상냥하고 밝아서 아침 같고
너는 고고한 나무의 꽃 가지 같고
너는 조용히 솟는 깨끗한 샘물 같다.
양지바른 들판으로 나를 따르고
저녁놀 진 안개에 나를 잠기게 하며
그늘 속에 내 앞을 비추어 주는
너는 차가운 바람, 너는 뜨거운 입김
너는 내 소원이며 내 추억이니
숨결마다 나는 너를 호흡하며
숨을 들이쉴 때마다 너를 들이 마시면서
나는 네게 입맞춤한다.
너는 고고한 나무의 꽃 가지
너는 조용히 솟는 깨끗한 샘물
너는 날렵하고 청순한 불꽃
너는 상냥하고 밝은 아침.
글쓴이 최재왕, 상업용 금지,
이 글은 요즈음 정신 문화적으로 유행하는 웰빙이나 휠링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와 오류를 스스로 발견하는 동시에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는 원리와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부분중 치매에 대한 의미는 오해를 불러 올수도 있기에 다시금 간단 명확하게 설명을 한다, 내가 이글에서 말하는 치매는 정신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육체적으로 발생하는 소위 혈관성 치매나 알츠하이머 치매라는 기타 병명은 단지 육체적 불구로 구분될 뿐이다, 따라서 육제적인 문제는 정신의 문제보다 하위 개념으로 육체는 정신을 넘어 설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설명한 것이다,
*참고ㅡ
美 치매 대란 경고… 한국도 2050년에는 237만명
[2050년 한국 치매노인, 현재 대구광역시 인구에 육박할 듯]
美, 2050년에 1380만명 예상 "치료·관리 비용만 2조 달러"… 한국은 노인 13% 치매 앓을듯- 미국의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치매)는 현재의 확산 속도로 볼 때 2050년이면 대유행(epidemic)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미 정부 지원 연구기관이 경고했다. 우리나라도 2050년에 치매 노인이 전체 노인의 13.2%인 237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치매 대란(大亂)이 예고돼 있다.
*
"미 노년층 1/3, 치매로 사망"
미국 노인의 ⅓이 알츠하이머나 기타 다른 치매 질환으로 인해 사망한다고 미국 알츠하이머 협회가 19일 발표했다. AFP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협회 회장 해리 존스는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살아남는 사람은 없다. 알츠하이머 병 자체로 인해 죽거나 다른 질환들과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죽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 미국 노인의 ⅓이 이 질환으로 사망한다.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지만 현재 치료방법이 없다"고 덧붙였다. 알츠하이머 협회는 환자를 장기적으로 치료하는데 드는 비용이 2013년 약 200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밝히며 시급히 질병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2050년에는 치료비용이 12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서울=뉴스1) 기타기사참조2013.03.20
주의ㅡ
한국의 정부나 의학계가 어떻게 치매를 알고 있을까? 이들의 치매에 대한 정보는 유전이나 가족력, 먹는 음식이 어떻다? 또는 과음이나 흡연? 불규칙한 생활 습관? 등으로 치매에 걸린다는 설명 뿐이다, 이들의 주장이란 소위 혈관성 치매나 알츠하이머 치매 등 육체적 불구에 대한 설명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을 보다 이해하고 가름하여 본다면 그러한 주장들은 정신적인 치매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간파할 것이다,
*
드디어 내 글의 가치와 진정성을 보증하는 기사가 나왔다,
[서울= 연합뉴스 2008.02.25 09:44] 한성간 기자
우울증은 인류의 삶에 도움 되는 방어기전-
질병으로만 보고 약으로 치료하려만 해서는 안돼!
우울증은 일종의 방어기전으로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론이 나왔다.
영국 정신의학연구소의 폴 키드웰 박사는 논란이 일고 있는 저서 `슬픔의 생존법(How Sadness Survived)에서 우울증을 고통스러운 현대의 질병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삶에 필요하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 속에서도 수천년을 인류와 함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방어기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이 24일 인터넷 판으로 보도했다. 키드웰 박사는 우울증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통찰을 부여해 삶의 어려움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다.
우울증은 심한 경우 무섭고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단기적인 고통으로 끝나며 여기서 헤어 나오면 스스로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키드웰 박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창의력까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하고 그 증거로 우울증으로 어두운 시련을 겪었던 존 스튜어트 밀, 윈스턴 처칠,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례를 들었다. 결국 우울증은 장기적으로 볼 때 인류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키드웰 박사의 이러한 이론은 우울증과 슬픔에 대한 현대사회의 태도에 의문을 갖는 학자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나왔다.
이들은 의사와 제약회사들이 질병의 진단에만 지나치게 치우쳐 우울증을 질병으로 간주하고 값비싸고 해가 될 수도 있는 약으로 이를 치료하려 한다는 비판적 입장을 보인다. 작년 미국의 일부 학자들은 의사와 제약 산업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감정인 슬픔을 질병으로 바꾸려하고 있다고 경고한 일이 있다. 슬픔의 상실이라는 책을 함께 쓴 럿거스 대학의 앨런 호로위츠 교수와 뉴욕 대학의 제롬 웨이크필드 교수는 슬픔이 정상적인 감정이며 건강과 웰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서 의료계에 대해 이를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두 교수는 슬픔이 인류와 함께 하고 있는 데는 진화론적으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슬픔을 약으로 없애려 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울증은 20명에 한 명꼴로 나타나고 있으며 4명 중 1명은 평생 중 그 어느 때에 우울증을 겪게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 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을 기도하거나 자해한 수는 2100명으로, 2002년(350명)의 6배로 증가했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지난해 항우울제를 생산하는 제약사들에 "항우울제는 자살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경고 문구의 부착을 확대하도록 요구했다.
조지프 글렌멀런(Glenmullen) 하버드의대 심리학과 교수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항우울제를 먹은 뒤 자살을 기도하는 미군 병사들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심각한 우려를 불러 일으킨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기사참조 2008.06.06
참고ㅡ
선진국 영국의 정신과학 연구진이 우울증은 자기보호 기전의 일종이라는 연구조사를 발표하였다, 우울증이 일종의 방어기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우울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보호 본능적 반응이라는 내용이다, 기사는 세계 최초로 우울증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전망이다, 우울증은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서 효과도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의 기사는 항우울제와 같은 약물이 신경 조직과 세포에 부작용이 많고 안좋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동시에 우울증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획기적이고 창조적인 도구로 활용할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기사는 내가 우울증의 경험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혜로운 방법을 주장하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울중이라는 마음의 병은 생각하는 방법으로 고쳐야 심신에 가장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을 형성하는 뇌의 건강은 그대로 육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위의 기사는 내가 정신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보게 되었다, 이들이 인터넷의 내 글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니겠지만- 의학의 본고장 영국에서 정신 과학적으로 주장하는 기사라 보다 신뢰가 가고 더욱 마음이 뿌듯하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가 우울증을 도구로 보다 쉽고 빠르며 현명하게 극복하는 방법만 알고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정신질환이라는 의학상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보다 새롭고 휙기적이며 독창적으로 높아질수 있는 정신적 차원의 계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울증과 치매에 대한 잘못된 역사는 나와 같은 자나 선진국의 정신과학 연구자로부터 보다 자세하고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위의 기사는 나의 경험과 혜안으로 대환영 받을만 한 것이다,
4)
오래전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연결되고 우울증이 치매로 어어진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때까지 나는 그러한 현상에 대하여 정신과학적 현상이나 의학적 기사를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었다, 단지 시적 사고관에서 나오는 통찰과 지혜를 정신적인 문제와 연관시키고 내면의 세계를 보다 심층적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 확신을 가진 것이다, 물론 내가 그것을 주장 할때는 나의 이름도 공개하여 내 글에 대한 신뢰와 책임을 함께 걸었다, 요즘에 들어 선진국을 대표하는 정신과학과 의학 연구진들이 발표하는 기사와 내용들을 살펴 보니 나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 혼자 수년을 앞서 간 것이다,
참고ㅡ
내 지능( I,Q )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초등학교 지능 검사는 65 정도로 기억한다, 시험은 문제의 내용이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려 90% 는 못 풀었다, 어떤 학생은 110 정도가 나와서 비교하며 자랑하였지만 나는 그것을 숨겼던 기억이 있다, 나는 40대에 지혜를 증득하였다, 나이를 먹었다고 지능이 높아지는 경우는 결코 없다, 지금도 나는 지식을 습득하는데 남들보다 어려움을 겪는다, 지식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어 더러는 핀잔을 받기도 한다, 지능은 어릴때 형성되는 것으로 어른이 되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는 성질이 다르다, 나이와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글은 지혜를 증득한 자의 글이다,
2010년 7월 14일- 초등학교 생할기록표 확인 ,
[ 성적기록표 = 수,우,미,양,가,ㅡ 5단계로 표현 ]
[ 5학년- 가,가,양,가,미,가,가,가,가 ]
[ 6학년- 가,가,양,양,가,가,가,가,가,]
[ 특기사항 및 지도사항란-]
성격이 약한편이며 남에게 의지하려고 함,
끈기있게 행동하나 둔한 편이다,
책임감이 희박하다,
급우간에 친밀감을 갖기 힘들며 고립적이다,
고집이 센편이며 학교 생활에 취미를 못 붙이고 있는 경향임...
애초부터 나는 지능이 너무 낮아 지식을 배우는게 어려웠다, 그렇다고 다른 재능이나 적성, 취미도 없었다, 단지 생각하는 기능이 정지되어 백치와 같은 현상만 나타났다, 조금만 생각을 해도 그것이 멈추고 정신이 하얗게 되면서 머리가 아팠다, 말을 이해하기 힘들고 생각을 할 줄 모르니 무지와 혼란, 무기력의 현상만 나타났다, 선생님이 성적표 맨밑에 지적한 부분은 "내가 무엇을 알거나 고집이 있어서 그렇게 한 부분이 아니라?" 내가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어쩔 줄 몰라서 그대로 있거나" 하던 부분을 오해하고 설명한 것이다,
국가적 과제ㅡ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는 육체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정신 건강과 발전에 관한 내용은 우리와 가까운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들은 정신의 문제를 구체적이고 심층적으로 간파하고 서로 연구하고 협력하면서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국제적 공감대를 이루기도 하였다, 정신적 문제의 부작용과 후유증은 사전에 점검하고 천문학적인 비용의 낭비를 막는 예방이- 가장 선도적 차원이라는 선택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같은 삶의 경향은 누구나 같은 문제로 존재하기에 개인은 물론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적 가치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선진국에서 인간의 정신 발전을 위한 방법 중 가장 좋은 예) 의 하나로 채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5)
주의하자ㅡ
이 땅에는 단지 잔머리와 말장난으로 타인에게 사기를 치거나 획책하는 정신분야 지도자가 넘치고 있다, 이들 중 더러는 종교지도자, 정신과를 비롯한 의학계, 혼자만 똑똑한 지식인, 등으로 보다 약하고 허술한 개인의 정신적 문제를 파고 들면서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 이러한 정신문화 현상은 후진국에서 나타나는 불량한 행태와 닮았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 이것은 한국의 정신문화가 우후죽순처럼 ?아나는 불량한 문제들을 냉철하고 심도있게 가려낼 만큼 성숙하지 못한 반증이다, 요즈음 각종 케이블 방송과 매스미디어가 웰빙이나 휠링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명확한 내용이나 이해를 간과한채 여과없이 방송하는 것을 자주 본다, 나는 그처럼 단체나 무리를 지어 하는 명상이나 기체조, 뇌호흡, 마음수련 등이, 혼자서 공원에 앉아 있거나 혼자서 조용하게 사색하거나 혼자서 가까운 실개천을 산책하는 효과보다 질이 떨어 진다고 판단한다, 또한 남의 미래에 공짜 복을 퍼주는 사주나 역학, 관상, 운명, 점, 타루, 등의 왜곡된 정신문화 현상도 우려스럽게 판단한다, 그것들은 공짜와 같은 행운이나 요행 따위를 호도하고 조장하는 행위로 과대포장에 다름 아니다. 우리 주변에 그러한 정신문화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에 각자 주의를 당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신문화가 구체적이고 합리적이며 철학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6)
세상에 공짜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한국의 정신분야 전문가란 자들은 지능적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있다, 그런 말과 행태란 우리가 마음의 중심을 잃어 버렸을때 무리에 들어가야 편하게 느끼는 것처럼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산으로 올라가면 마음이 열리는 듯 하지만 내려 오면 현실의 문제와 직면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의 문제를 외부에서 해소하려는 발상은 우리의 눈과 귀만 어지럽게 될 뿐이다, 내안의 문제에 대한 대응 능력을 스스로 키우는 것보다 현명한 것은 없다,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를 스스로 검증하거나 확인할수가 없다면, 그것은 가족이나 후세에게도 물려 주지 말아야 한다, 일시적 만족을 유도하는 긍정주의나 낙관주의도 비현실적이고 제한적이다, 오죽하면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 조차 자신의 주장은 잘못 되었다고 양심고백을 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가와 종교가들이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을 차용해서 써 먹었지만 결국 막을 내린 것이다, 구체적인 설득력도 없고 객관적 대안도 못되는 그것은 창시자인 마틴 셀라그만 조차 검증을 할수 없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가능한 영역에서 목표를 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과학적이다, 공짜와 같은 기적을 바랄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만큼 이루어 지는 공평한 것을 추구하자!" 우리가 가야 하는 목표는 바로 그곳ㅡ 지혜의 경지이다,
7)
핵심ㅡ
이 글은 지혜에 관한 내용이다, 지식의 상위 개념이 지혜이다, 지식은 배워서 알듯이 지혜도 배워야 한다, 실로 알수가 있다면 지혜는 공평하다, 단 한치의 공짜가 없다, 누구라도 시도하고 노력하면 지혜를 증득한다, 그렇다고 지혜와 관련된다는 한국의 시인이나 철학자, 종교지도자를 찾는다고 함부로 나서지 말아라- 언제나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므로 지혜의 본질과 핵심을 벗어나게 만든다, 따라서 그대가 이 글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먼저 이것부터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지혜라고 하는 표현은? 그대가 아는 지식으로 지혜를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은 모두 접어 두어야 한다, 먼저 그것을 인정해야 진도가 나아갈수 있다, 한 예)로 불교에서 고승이 제자에게 "오직 모를뿐! "이란 말로 깨달음의 시작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적 의미와 가치는 모두 접어 선반 위에 두어라! 그대는 인식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지혜를 설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지혜란? 새로운 생각으로 인식을 자각하고 새로운 변화를 체득하면서 새롭게 얻게 되는 앎의 현상을 지혜의 시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즉ㅡ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지혜의 시작이다,
주의 : 이 글에서 해탈의 경지라는 표현은 지혜의 경지를 나타내는 동의어,
지혜란 무엇인가?
(1)
사실 나는 지혜가 무엇인지? 어떻게 지혜를 체득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40대 초반에 우연히 세계시( 한국어 번역 )를 통하여 지혜를 증득하였다, 그것을 시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끝임없는 인내와 용기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몇번의 갈등과 선택을 넘어 지혜의 산 정상에 서 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누구라도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글이 완성되면 가장 쉽고 빠르며 편리한 방법으로 지혜를 증득할수 있다, 세계처럼 열린 마음과 위대한 사고방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수 있다, 내가 이글을 쓰면서 겸손을 부리거나 거만을 떤다고 보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것도 함께 나누고 발전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한그루 나무를 심는 자ㅡ아주 천천히! 느긋하게ㅡ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이 글에 손을 내 밀어 무르익은 열매를 따 먹기까지! 삶의 길에는 희로애락과 생노병사에 놓이고, 허물을 벗지 못한 인식은 정신적 물질적 시간적 손실이 따라 온다, 세월이 갈수록 의지는 약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휘둘리니, 아무리 돈 많은 부자에 권력이 있고 명성이 높아도 소용이 없다, 스트레스는 쌓이고 우울증을 낳으며 치매를 부르니-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글은 스트레스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자, 자신이 부족하거나 큰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자,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는 자, 우울증과 치매에서 해방되고 싶은 자, 종교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생기지 않은 자, 삶과 죽음의 문제를 명확하게 알기 바라는 자, 삶에 대한 회의로 끝없이 절망하고 있거나 그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자에게 필요한 내용이다,
그 밖에 인문학의 핵심인 시와 철학, 예술, 의학( 정신과 ) 종교 등에서 이같은 지식을 다루기 전에 반드시 읽어 보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이 글은 인간의 핵심적 가치인 지혜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 에밀리 디킨슨-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ㅡ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 ㅡ
의식처럼 찾아 오는 느낌 ㅡ
마치 무덤처럼 신경은 엄숙히 가라않고 ㅡ
얼어버린 심장은 질문하네,
바로 그였느냐고, 고통했던 이가,
어제, 아니 수세기 전부터?
발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네ㅡ
땅 위건, 공중이건, 아니 허무속이건 ㅡ
멋대로 자란 숲길,
수정처럼 명징한 쾌감ㅡ
이것이 선각자의 시간ㅡ
기억해야 하리, 끝내 살았다면,
냉동되는 인간이 눈을 상기하듯ㅡ
처음에ㅡ 오한이 나다가ㅡ이윽고 황홀ㅡ
이윽고 해방이 오는 것을,
참고ㅡ
에밀리 디킨슨은 세계적인 미국의 여류시인이다, 에밀리 디킨슨이 쓴 시들은 대부분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시는 한국의 시인들, 또는 시문학에 박학다식한 대학교수라고 하여도 의도를 모른다, 그들은 단지 막연한 추측만 가능할뿐이다, 그들은 이 시에서 "크나큰 고통" 이 어떤 문제? 무엇에 대한 고통인지? 어떤 과정을 쓴 내용인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내용은 자신이 경험을 하지 못하면 시인의 의도를 알수가 없다, 시의 어떠한 부분도 간단명확하게 설명할수 없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설명할수 없다면 시를 모른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시란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지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그녀처럼 사고에 해방이 없는 자- 즉 해탈을 하지 못한 자는 이 시의 내용을 알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면의 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읽는 자가 반드시 시인의 내면과 같은 수준이 되어야ㅡ 시의 의도를 명확하게 분석하고 간파할수가 있다, 그는 크나큰 고통에서 보다 냉철하게 자신을 통찰하면서 사고가 해방이 되는 과정을 이러한 시로 요약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내면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통찰하고 스스로 인식을 넘어서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선각자가 될수가 있고 무한하고 자유로운 사고로 해방이 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 )
(2)
나의 글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인성을 발현시켜 창의성을 높여 준다, 또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우울증을 예방하는 동시에 노년에 생기는 치매까지 예방한다, 내가 오래전부터? 시간이 날때마다 인터넷 토론방 등에 지속적으로 올리던 이 글로 인하여 정부가 인성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에 대한 주의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고, 치매의 문제도 중요하게 인식하여 "이제부터 치매는 국가가 관리한다!" 는 정책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나같은 사람은 나비 효과의 진리를 추구한다, 현자는 작게 외쳐도 멀리 나가는 법이다, 인터넷에 지속적으로 올리는 나의 글 때문에 정부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도대체 우울중과 치매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는데? 언제까지 모른체만 할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신의 실체를 분석하는 마땅한 방법도 없는데? 그것을 나같은 사람에게 물어 본다는 것은? 도무지 체면이 안섰던 것이다, 여하튼 정부가 심각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나섰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정신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도 없던 정부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활을 했다는 정도로 만족한다, 그러나 정부가 선도하고 예방한다는 몇가지 내용을 보니 여전히 주먹구구식 방법만 되풀이 할 뿐이다, 애초부터 인간에 대한 편견과 무지 때문에 막대한 혈세 낭비와 기회 낭비가 예정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내용을 의학계인 정신과나 정신과학, 또는 종교 등이 안다는 발상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들은 자신조차 모른다, 정신의 실체를 지식으로 아는 것인지 지혜로 아는 것인지 한번쯤은 거울을 보고 살펴 보라,,
(3)
나는 아직도 성경이나 불경을 모른다, 그러나 세계시를 통한 통찰과 지혜로 모든 것을 본다, 세계시는 정신분야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시는 정신의 핵심이고 가치의 제왕이다, 붓다의 시가 많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도 지혜를 알려면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시각을 넓혀야 한다, 오직- 종교적인 방법으로 지혜를 증득한다는 발상은 맹목적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종교에 능통하고 지식을 쌓아도 지혜를 알기가 어렵다, 종교의 예)를 들자면 기독교는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이 없다, 천주교는 수도사, 불교의 수행자가 있는데 이들 중 아주 극소수만 지혜를 증득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법이다,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은 쉽고 빠르며 현명해야 한다, 지혜라는 것은 정신분야에 관련된 책을 보아도 알수가 없다, 더구나 지식인이 정신분야의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그것은 엄청난 오해이며 착각이다, 지식과 지혜는 별개의 성질이다, 지식인은 지식적 타성과 인식의 모순으로 정신의 핵심을 알수가 없다, 그들은 아무리 명성이 높고 박학다식하고 하여도 지혜를 알수가 없다, 우리가 지식인과 소통하는 방식은 쉽지만 지혜인과 소통하는 방식은 제한되어 있다, 지식인의 글은 미사여구가 많아 재미를 주지만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은 들어 있지 않다, 반면에 지혜인의 글은 미사여구가 적어 재미는 없지만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이 들어 있다, 지혜는 기능적 지식과 관계가 없고 내면을 성찰하는 감성과 관계가 있다, 지식은 모두에게 배울수 있으나 지혜를 배우는 방법은 오직- 지혜를 증득한 자에게 배워야 한다, 말이란 지식은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기능적이고 표피적인 것ㅡ 우리는 그것의 내면을 알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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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이정표가 없고 끝이 안보이는 길을 가지 않는다, 자신이 모르는 길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고 돌아오는 길을 잃으면 얼마나 낭패인가? 정신의 문제도 이와 같다, 자신도 모르게 번민과 망상의 길로 들어가 방황하다 돌아오는 길을 잃는다면 얼마나 두려운가? 가보지 않은 길은 문제가 따르고 위험을 동반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던 습관된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정신의 문제를 유발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생각의 길을 막아 혼란을 유발하고 만병의 근원을 만든다, 처음부터 가고 싶지 않은 길이고 부담과 혼란이 동반되는 곳이다, 스트레스는 내면의 가치를 왜곡시켜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우울증에 빠지게 유도하고 각종 사건과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치매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정신이 왜곡되면 알콜 중독, 마약 중독, 담배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등의 행위를 유도한다, 자신도 모르게 중독에 빠지고 습관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절망의 끝에서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문제도 생각이 왜곡된 경우이다, 자신도 모르게 분별력이 떨어지고 사고의 폭이 좁아지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우리의 사고는 외부에 습관되고 내면을 살피는 습관이 안되어 있다, 외부에서 습관된 지식은 고정된 관념을 쌓으며 인식을 확고하게 만들지만- 심신이 쇠약하면 자신이 완전하게 생각하던 만큼이나 무너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누가 그러한 문제에 노출되지 않으며? 누가 자신의 미래가 그렇치 않다고 보장하는가?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알고 있으며 예방하는 길은 있는가? 그런데 그곳에 길이 있었다, 정신의 실체를 자각하고 그 길을 지나간 세계의 시인과 철학자, 성인이 "누구라도 노력하면 지혜의 경지로 간다! 고ㅡ가르쳐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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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신이 왜곡되는 원인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언제나 문제에 직면하고 막다른 길에서 후회한다. 더러는 남들의 문제라고 회피하고 더러는 종교를 찾아 가지만 그것조차 완전히 믿기가 어렵다, 자신도 모르는 신에게 매달리는 것이 막연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무리 종교를 찾고 신을 믿어도 의문은 남게 마련이다, 과연 신은 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확인 할수는 있을까? 하지만 그것을 아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찾고 신을 믿으려는 노력보다 자신을 아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아는가? 옛날부터 세계의 시인과 철학자, 4대 성인이라는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예수가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깨달아 부처가 되어라! 너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자유하여라! 는 등- 간단 명확한 말로 지혜를 설명하였다, ( 모두 같은 말이니 혼동하지 말자! ) 사람들은 그말을 믿지 않았다, 부디- 자신에게 잠재한 지혜를 발견하고 무한하고 자유롭게 되어라ㅡ고 간곡하게 당부를 하였지만 사람들은 설마? 하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길로 가려는 사람조차 터부시 하였다, 왜냐하면 위대한 사고방식과 드높은 명성의 선각자인 세계적 시인과 철학자, 성인들이 지나간 길은 사람들이 넘지 못하는 성역처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도 시도를 해보거나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길을 가던 사람조차 중간에서 체념하거나 포기를 하였다, 아직도 사람들은 지혜를 증득하면 얼마나 자신이 현명하고 창의적이며 자유롭게 되는지 모른다, 따라서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지혜의 가치를 알수가 없다, 사실 우리가 위대한 그들의 말을 믿던 말던? 종교를 찾아 신을 믿던 말던? 사실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가장 먼저 자신을 아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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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혜를 어떻게 아는가? 한 예)로 불교는 간화선으로 지혜를 가르친다, 그들은 머리를 깎고 삶의 전체를 종교에 귀의하지만 수년간 혹독한 과정을 거쳐도 극소수만 지혜를 증득한다, 이러한 결과는 그 방면에 고승들이 더 잘 안다, 일생동안 수행에 전념하고도 지혜를 증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헤아려 보라ㅡ오히려 종교가 혼란을 유도하고 인식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라ㅡ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샅된 말에 현혹되어 인식의 한계를 걸머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렇게 쓸데없는 자존심과 허세를 오기처럼 부리다 완전히 믿지도 못하는 종교에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렇게 마지막 결단처럼 종교에 귀의하고 오직 지혜만 바라보다 아무것도 모른채 허송 세월만 보내야 하는지? 더구나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사이에 심신은 쇠약해지고 우울증과 치매를 겪으며 죽어가야 하는지? 이처럼 자신을 모르는 인간은 불행하지 않는가! 어차피 그렇게 될바에는 내가 아는 현명한 방법을 시도하는 것은 어떤지? 그리하여 천천히 헤아려 보라! 아직도 저들은 내 말의 핵심을 모른다- 종교적인 방법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르며 간단하다는 것을! 따라서 평생에 있을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왜냐하면 여러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기나긴 삶에서 자신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부디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기를 기대한다, 그 길에 들어서면 마음이 나는 법을 알게 된다, 어떻게 사고의 균형과 자유가 이루어지는지ㅡ 어떻게 지속적인 행복을 얻게 되는지ㅡ 그리고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ㅡ 자신이 증득한 지혜의 눈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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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에서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에 세계시를 연결시켜 놓았다, 그런데 누가 "나도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세계시( 내가 말하는 세계시란 한국어로 번역된 것,)를 읽으면 지혜의 경지에 오르면 우울증이 없어지며 치매도 예방되나요? 하고 물었다, 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요? 지혜의 경지를 그렇게 가볍게 오르려고 하다니? 나는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았고 그의 기대를 들어 줄수 없었다, 사고의 발전은 한치의 공짜가 없다, 부단한 노력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성의 체득ㅡ세계 시를 모두 이해하고 안다고 하여도 반의 과정을 통과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세계시의 지혜를 모조리 체득하고 완전하게 되었다고 판단을 하였는데? 그것은 실로 엄청난 오해이고 착각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도 몰랐던 내 안의 감정이 심오한 문제를 일으키며 사고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나는 다시금 바닥으로 추락하였고 길을 잃고 방황하였다, 세상 어디에도 길은 있었지만 사고의 길은 찾을수가 없었다, 아득한 사막처럼 해메이고 방황하다 우연한 문제로 고개를 돌렸는데ㅡ 아ㅡ 거기에 새로운 길이 보였다, 세상에 그런 길이 있다니! 그것은 정신 발전의 지도에서 세계시를 아는 만큼 가치가 있었고 비중이 컸다, 바보같은 내가 세계시를 알고 세상을 다 가졌다고 판단하고 우월감에 도취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 가고 있는데ㅡ내 안에서 심오한 감정이 본능적 의지를 일깨우고 다시금 인식의 바닥을 시험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바른 길로 들어 갈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시로부터 알게 된 이성의 깨우침은 지혜로 들어가는 시작이었고, 감정을 체득하는 훈련은 지혜의 완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마치 우연처럼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가르침이 나에게 행운의 문을 열고 다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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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체득, 그것은 "마법같은 돈키호테의 속삭임!" 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자 나의 머리가 그곳에 꼿치면서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다, 이후에 예기치 못한 과정을 겪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심각한 동요를 일으켰다, 혼자서 감당하기가 역부족, 나는 막다른 골목에 부딛쳤다, 그러다 언뜻 스치던 사람이 청문회스타 노무현( 대통령이 되기 2년전? )이다, 어쩌면 그가 나의 문제를 해결하여 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전화를 하였다. 내가 말을 끝내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묵언의 통화, 나에게는 그것이 내안의 바닥을 확인하고 지혜의 다리를 건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던져 준 묵언의 의미가 감정의 바닥까지 흔들자 인식의 문이 열리면서 지혜의 완성을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등산을 하다가 절을 지나는데 고승들이 써놓은 시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런데? 저 시문은 너무 쉽게 보이지 않은가? 분명 나같은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나에게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이해가 되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현상이었다, 문득 나의 정신 세계가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불교 방송을 틀어 보니- 붓다가 말하던 세계는? 이미 도달하여 있지 않은가! 그리고 벌써 20년이 되어 간다, 나도 인생의 한때, 어쩔수 없던 머리와 주눅이 든 삶에서 한번 쯤은 부단한 노력을 다한 것이다, 아직도 그것은 사력을 다한 경기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나이 40세 무렵에 심각한 우울증을 겪다가 세계시를 접하고 보다 폭넓은 시각을 가진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면서 내 안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억겁의 세월을 돌아 보라ㅡ 인생이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찰나와 같다, 늘 깨어 있어야 하리니ㅡ 우리의 시간 개념이란 돌아 볼때야 확인될 뿐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삶에서 무엇보다 시간을 소중히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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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쉬타인은 1954년 철학자 에릭굿- 카인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게 신(God)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 또는 그 산물에 불과하다" 고 적었다. 아인슈타인은 "성경이 한편으로는 명예롭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 이라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그점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인쉬타인은 자신이 불교를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없었고 불교를 믿지도 않았다, 그가 말한 의도는 자신의 사고를 불교와 비교하여 보니 불교가 주장하는 인과응보와 닮았던 것이다, 인과응보- 사실 이 말은 상식적인 말이지만 가볍게 흘려 보내지 않던가? 우리는 말이 어렵거나 엄격한 이해는 부담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지혜는 노력하는 만큼 얻게 되는 것이므로 시간이 갈수록 간단 명확한 결과로 나타난다, 사고가 발전하는 방법은 과학적인 원리를 닮은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을 신뢰하고 일관성을 추구하면 과학이 계산하는 수처럼 스스로 완성되어 간다, 인식의 변화는 객관적으로 공정하고 상대적으로 동등하며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불교는 혼자서 깨달아 지혜의 경지에 도달한 자를 독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러 설익은 불교는 혼자서 깨달은 자를 자신들 아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항아리같은 종교로 깨달은 그릇이 편협하고 가소로울 뿐이다, 아인쉬타인은 "이세상 모든 것은 더 이상 걷어 낼 것이 없을때 까지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 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간단하게 설명 할수가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이라고 일갈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혁신과 창조의 아이콘 애플의 스티브잡스도 마찬가지이다, 한때 스티브잡스는 인도의 선불교에 심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없었고 선불교를 믿지 않았다, 아인쉬타인과 스티브잡스는 스스로 노력하여 지혜의 경지에 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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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경지에 있으면 모든 것이 심플하고 명확하게 요약이 된다, 스티브잡스는 존 스컬리에게 자신이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 파리에서 시인이 돼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ㅡ바로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시인은 본질과 핵심을 추구한다, 무엇이든 간단 명확하게 요약이 된다, 세기의 천재 아인쉬타인과 스티브잡스, 그들은 시적 사고를 지닌 것이다, 스티브잡스는 “사람은 천재가 아니면 바보이며 그 중간은 없다”고 말했다, 누구라도 지혜의 경지에 오르면 천재와 바보의 간극이 명확하게 보인다, 붓다가 말한 것도 같은 의도이다, 깨달으면 부처이고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다, 그 중간은 없다" 고 말했다, 아무리 지식인이 뛰어 보았자 부처의 손안에 있듯 인간의 정신은 지혜인의 손바닥 안에 있다, 스티브잡스는 자신은 "필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지혜가 통찰력과 직관을 관장하면서 인식을 간단명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척보면 아는 것이다, 이처럼 지혜를 증득하면 각자가 추구하는 개성만 다를 뿐- 같은 경지에서 최고의 가치로 확인 된다, 큰 그릇으로 작은 그릇을 담는 원리처럼 간단하게 진리가 드러난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지혜인의 길로 나아 갈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를 증득한 자로부터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주의하라! 지혜의 길이란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가면 평생을 해매이기 쉽상이며 중간에 스승을 바꾸는 것도 어렵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 모른 채 아까운 인생만 낭비 할수가 있다, 지혜의 길을 제시하는 자가 현명한 시적 사고관을 지니고 있다면 가장 빠르게 그 길을 찾아 가게 된다, 그대들은 너무 어렵게 그리고 멀리서 그것을 찾아 헤매인다, 그러한 곳으로 갈수록 헛 것만 찾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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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 와 EQ 는 무엇일까?
인간의 뇌는 지능( IQ )과 감성( EQ )이 존재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능( IQ )만 알고 있다, 오직 지능( IQ )만 추구하고 활용할 뿐이다, 요즈음 이외수 선생님의 주도하는 감성( EQ )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감성( EQ ) 전도사를 자청하고 있다, 우리의 뇌가 감성( EQ )이 높으면 어떠한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아직도 그것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가 없기에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분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뇌에서 지능( IQ )과 감성( EQ )은 각각 별개의 성질과 역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IQ란 지능을 말하는 것으로 기억과 기능을 형성하고 고정과 질서를 담당 한다, EQ는 지혜를 추구하는 것으로 감정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통찰과 직관을 담당 한다, 즉 감성이란 EQ는 인식의 변화를 조율하고 합리를 추구하며 위대한 창조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능( IQ )은 아이부터 청소년기에 인식을 형성하는 기능이고, 감성( EQ )은 청소년부터 성인기에 발전을 추구하는 기능이다, 따라서 아이는 지능( IQ )을 높이는 교육을 하고 청소년부터 성인기에는 인식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감성( EQ ) 훈련을 병행해야 한다, 인간은 반드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나이를 먹을수록 인성이 확립된다, 실로 나보다 지능이 높은 보통이나 이상인 자가 감성의( EQ )벽만 넘으면 누구라도 위대한 지성인이 될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대부분의 세계적 지성인은 보통의 지능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지혜를 통하여 최고의 능력과 자질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IQ와 EQ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인간적 완성인 지혜로부터 현명하고 획기적이며 독창적인 가치가 발휘 된다, IQ가 높아 지식과 재능이 뛰어난 영재들이 어른이 되어도 위대한 가치와 독창성이 없는 것은, 자신의 EQ를 발달 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IQ가 낮아도 EQ에 통달한 사람은 지식과 재능이 떨어져도 위대한 지혜가 발현되어 언제나 최상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극대화 시키는 EQ 즉 감성을 체득하고 인식의 벽을 넘어야 한다, 그리하여 변화와 혁신, 창조와 자유로부터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러한 인식의 상태를 세계관 또는 우주관이라고 정의한다,
문득 세계적인 하버드대 교수의 다중 이론이 생각났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그의 주장은 내가 주장하는 가치와 핵심에 다름이 아니다, 가드너 교수의 글이 내 글의 설득력과 신뢰성을 높여 준다, 그의 글이 보다 객관적인 사실로 증명되지 않은가? 나는 가드너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 따라서 그와 내가 주장하는 지혜의 그것은ㅡ 인간의 능력과 자질, 특성을 스스로 발전시켜 보다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무한한 인간으로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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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밑의 글은 인터넷 정보에서 하버드의 하워드 가드너교수의 글을 부분 발췌한 것이다,
다중지능 주창자 하워드 가드너 인터뷰
“현재의 교육 처방, 완전히 잘못됐다”
지난 20세기 동안 미국의 교육계는 소위 IQ에 대한 열광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립학교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IQ 검사를 했던 때와 그 점수까지 기억할 것이다 (우리 학교는 물론 그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선생님의 책상에 가서 각자의 점수를 확인했다 ). 뇌에 대한 연구가 오늘날처럼 뇌의 가소성 ( 자극에 의해 변화하는 성질 ) 을 규명하기 이전에는 인간의 정신 능력이 고정돼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IQ를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지능에 순위가 있다는 개념은 효율적이고 잘 정비된 교육 체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 ( 혹은 그렇지 않은지 ) 알게 된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개념이다. 지능에 대한 이 같은 단일한 시각은 오직 한개의 정답만 존재하는 획일적인 시험으로 학생과 학교의 발전을 측정하도록 조장한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지능에 대해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뇌 손상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예술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그의 연구는 뇌가 얼마든지 탁월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밝혀냈다. 1983년 출간된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마음의 틀: 다중지능(Frames of Mind: The Multiple Intelligences)》에서 가드너는 일곱 가지 지능을 제시했다.
음악 지능, 신체 지능, 논리수학 지능, 공간 지능, 언어 지능, 인간친화 지능, 자기성찰 지능이 그것이다. 지능에 대한 이 같은 새로운 개념은 교육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점차 널리 받아들여져 오늘날에는 지적 능력이 획일적이거나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거의 상식으로 여기게 되었다. 가드너는 IQ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기 위해 그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천편일률적인 시험과 단순 암기 위주의 교육 방식, IQ가 주도하는 현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최초로 다중지능 개념을 제안한 지 25년이 지나서도 가드너는 자신의 이론을 계속 발전시켜왔고, 몇몇 사립학교에서는 그가 제안한 교육 방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No Child Left Behind’( 뒤떨어지는 학생이 없게 하자는 부시 정권의 공교육 개혁 프로그램. 학생들의 평균 성적을 개선하기 위해 시험을 통해 각 주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해 결과를 발표함 ) 정책으로 인해 표준화된 시험이 공교육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기타 인터넷 내용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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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국립 영재 연구소 소장. 코네티컷 대학 교육심리학 석좌 교수, 백악관 영재 교육 최고 자문 위원인 렌줄리 교수(Dr.Renzulli)는…“지능ㆍ과제 집착성ㆍ창의성…영재 3대 조건”이라고 말한다,
영재교육에서 심화학습 3단계 모형을 개발하게 된 과정은.
▶ 당시 재직하던 학교에서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지능은 평범하지만 최고 성적, 최고 지능을 지닌 학생들보다 더욱 창의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학생들을 보게 됐다. 그래서 창의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됐고 결국 평생 관심분야가 됐다.
영재성이 발현되는 시기는 언제인가. 나이와 관계가 있나.
▶ 분야에 따라 영재성이 발현되는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 영재성이 발현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나이는 다양했다.
40대가 넘은 성인의 경우에도,영재성이 발현될 수 있을까.
▶ 그런 사례가 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던 분야에서 영재성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창의성 분야에서 엄청난 재능을 보이는 성인들이 있다.
포커스 기타 기사 참조 2010-05-28
렌줄리 교수(Dr.Renzulli 현재 미국 국립 영재 연구소 소장. 코네티컷 대학 교육심리학 석좌 교수, 백악관 영재 교육 최고 자문 위원 )가 세계에서 탁월한 지혜와 독창성을 보이는 위대한 사람을 연구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들의 공통점은 보통의 지능과 다름없었다,
하버드의 가드너 교수와 렌즐리교수도 내가 주장하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세계적인 학자인 저들도 내가 주장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지능이 떨어지는 나같은 자에게도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이 적용한 것이다, 초등학교 전체를 꼴찌로 졸업하고 21세? 나이에 겨우 중학교 졸업을 컷닝으로 통과한 자가 감히 무엇을 안다고? 이러한 글을 쓰고, 더구나 지혜란 것을 주장하겠는가? 단지 아래의 길이 훤하게 보여서 가장 쉽고 빠르고 현명한 길로 안내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세계의 저들과 같은 시각으로 핵심을 다루는 것이나- 지혜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금방 알수가 있지 않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드대의 가드너와 코네티컷의 렌즐리, 예일대학의 스탠퍼그 교수는 오랜 연구와 분석을 통하여 보통의 지능도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검증하고 확인하였다, 하지만 나는 저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고 선택한 경험으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서로 그길을 알았던 방법이 다르고 지나간 방법이 다르지만 지혜의 가치를 발견한 것과 주장하는 목표는 같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가치와 핵심을 저들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로 증명할 수가 있다, 저들이 연구 결과로 확인한 사람들이란? 결코 지식을 배우고 익혀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한때, 일정한 방법과 노력의 과정을 통하여 위대한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따라서 그대들은 세계의 지성인 가드너와 렌즐리, 스텐버그 교수와 내가 경험으로 주장하는 지혜의 가치를 그대로 신뢰하고 추구할 것인가? 그렇치 않을 것인가? 에 따라서 삶과 미래가 결정된다, 왜냐하면 위대한 가치인ㅡ 지혜의 경지! 그것은 분명 억지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천재가된다"
지적 능력이 중상 정도만 되어도 심력이 강하면 영재로 성장 할수있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렌즐리교수-
저들이 보통의 지능으로 위대하게 된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 너무 많아 간단하게 예) 로만 들겠다, 렌줄리 소장이 오랜 연구 결과로 위대한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고 강조한 것은 지능이나 나이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이다, 누구라도 자신에게 잠재된 인식의 가치를 자각하고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세계의 지성인 그들이 왜? 어떻게? 위대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설명과 방법은 이 글의 끝으로 가면서 결론으로 설명하겠다, 단지 간단 명확하게 요약을 하자면,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높이고 위대한 지성인이 되려면 반드시 EQ를 체득하는 과정을 거치고 인식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현자의 말처럼 “파도가 올라가면 모든 배는 다 올라 간다" 는 뜻은- 내가 주장하는 지혜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우리는 오직 한가지- 지혜만 증득하면 모든 것이 따라 간다는 진리를 간파하고 시기 적절한 때를 활용해서 그것을 시도하도록 유념하라, 그대들은 내 말을 믿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내용의 글은 몇 문장만 보아도 쓰는 자의 의도가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가! 더구나 정신 발전에 관한 지혜의 내용은 자신이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단 한 문장의 내용도 쓸 수가 없다, 그대들은 내 말을 신뢰해야 한다, 내가 주장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지혜를 배우는데 가장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저들이 주장하는 지혜의 길을 가장 빠르고 쉽게 가르쳐 줄 유일한 이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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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정보 참조
[생각의 탄생]
세계적 배스트셀러 저자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말하는 창의력과 리더십-
지혜, 직관, 연마하면 70대도 가능- " 미래엔 지식의 양보다 창의성이 중요"
창의력이나 상상력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물론 창의력.직관력은 부분적으론 타고난 재능이다. 그러나 누구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재능을 계발할 수 있다. 학교에서 악기 연주나 그림 그리기를 배웠던 경험을 떠올려 보라. 천재의 대부분도 노력파였다. 모차르트나 아인슈타인도 잠을 줄여 가며 일했고, 그들에게 닥친 시련을 이겨 냈다. 창의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천재들이 간 길, 그들이 활용한 생각의 도구를 습득하고 연마하는 것이다. 같은 노래라도 뛰어난 가수에게 배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책에서 감성과 놀이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게 사고력 강화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끼치나.
"분야를 막론하고 노벨상 수상자들은 직관이 매우 발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수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수학적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이 주는 느낌을 바닥에 구르고 의자에서 뛰어내리는 등의 육체적 움직임으로 표현하곤 했다. 숫자는 무형의 것이지만 파인먼은 머릿속에서 그것을 분명한 형체로 인식할 줄 알았다. 이런 능력을 키우려면 실제로 손을 자주 쓰고 신체적 놀이를 즐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대학 시절 자전거 조립에 몰두했으며, 지금은 가구를 짠다. 아내는 뜨개질을 즐긴다."-40대, 50대가 돼도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는가.
"세상에는 50대에 첫 책을 내고 60대가 돼서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쌓인 지혜와 직관을 창조적 생각 도구를 통해 연마하면 70대에도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경영자나 과학자에게 교양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양은 삶이며 우리가 어떻게 인류가 중시하는 가치에 도달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억의 기록이다. 또한 교양은 좋은 시민을 만든다. 특히 과학자나 기술자에게는 교양의 기초가 반드시 필요하다. 위대한 발명을 하려면 문화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발명품이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쓰이고 보급될지,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지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발명가는 자신의 발명품을 세상에 알리고 효과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효율적인 의사 전달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교양이 바로 그런 일들을 가능케 한다. 혁신가(이노베이터)야말로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휴먼아트)와 소통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이들 부부는 "자녀를 창조적 인물로 만들려면 지루하고 따분하게 만들라"는 이색적인 주문을 했다. 부모들은 대개 아이가 가능한 한 많은 활동을 해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놀이 방법을 창안해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유명 오페라 공연을 보여주는 것보다, 스스로 대본을 쓰고 의상을 만들어 연극을 연출해 보도록 하는 것이 창의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고? 중앙일보 기사 참조
예)
(1) ‘생각’을 다시 생각하기
(2) 상상력을 학습하는 13가지 도구
(3) 생각도구1 관찰
(4) 생각도구2 형상화
(5) 생각도구3 추상화
(6) 생각도구4 패턴인식
(7) 생각도구5 패턴형성
(8) 생각도구6 유추
(9) 생각도구7 몸으로 생각하기
(10) 생각도구8 감정이입
(11) 생각도구9 차원적 사고
(12) 생각도구10 모형
(13) 생각도구11 놀이
(14) 생각도구12 변형
(15) 생각도구13 통합
위의 글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이러한 내용은 부분적으로 동의할수 있어도 시도하는 방법은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위에 열거한 단계 중 한개만 부족해도 위대한 지성인이 될수 없다는 뜻이다, 최고의 영재가 되는 방법을 15가지로 요약해 놓았지만 각 단계마다 어디까지 정해야 되고 어디까지가 끝인지 가름이 되지 않는다, 지식을 배우는 방법은 설명하였으나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지식이 탁월해도 지식만 배운 자들은 엉클어진 실에서 한 오라기만 잡아 올리는 지혜를 모른다, 나는 그러한 방법을 처음부터 배제한다, 그리고 단 한가지, 모든 것을 끌어 올리는 지혜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가 주장하는 방법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되어 있고 시작과 끝을 혼자서 검증하고 알수가 있다, 사실을 알고 보면 렌즐리 교수가 확인한 위대한 그들은 15가지 단계를 거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장하는 두 단계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세계에 위대한 자들의 언어와 행위, 작품도 똑똑한 지식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현명한 지혜를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개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단지 우리보다 먼저 지혜를 증득했다는 이유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자는 시로 어떤자는 소설로 어떤자는 철학으로 어떤자는 음악으로 그리고 어떤자는 미술로 어떤자는 조각으로 어떤자는 과학으로 어떤자는 정치로 그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지혜의 경지에서 표현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한길은 여러길로 통하고 여러길은 한길로 통한다, 세계적인 그들의 언어와 행위, 작품의 가치와 의도를 알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아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도구에서 가능할 뿐이다,
위대한 지혜는 지식의 가치를 알지만 지식은 지혜의 가치를 알수가 없다, 그것은 위의 가치에서 아래의 가치를 알아도 아래의 가치에서 위의 가치를 알수가 없는 원리와 같다, 지혜란 같은 눈높이에서 보아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지식의 상위 개념이 지혜란 말은 영원한 진리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세계적인 그들의 언어와 행위, 작품은 시적 가치와 핵심이 압축된 표현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혜의 언어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혜를 증득한 시적 사고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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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 A. 슈바이처,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형성에 있다. 교육의 목적은 기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또한 교육의 비결은 상호존중의 묘미를 알게 하는데 있다. 일정한 틀에 짜여진 교육은 유익하지 못하다. 창조적인 표현과 지식에 대한 기쁨을 깨우쳐주는 것이 교육자 최고의 기술이다. -아인슈타인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이란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정신이 죽어 있는 삶을 이른다. -A 슈바이처
*진리에 대한 의지와 마찬가지로 성실성에 대한 의지도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실성에 대해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시대만이 그 속에서 정신력으로 살아 움직이는 진리를 소유할 수 있다. 성실성이란 정신 생활의 기본이다. 성실성이 튼튼히 자리하는 곳에 평온이 깃든다. 평온은 성실성의 깃발이다. A -슈바이처
*나의 길을 밝혀 주고, 항상 인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친절과 미(美), 그리고 진리였다. -아인슈타인
*내가 성취하고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은 진리와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아무도 즐겁게 하지 못하는 위험에 대한 정의에 봉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아인쉬타인-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神秘)이다. 참된 예술과 참된 과학의 요람은 바로 이 기본 감정이다. 그 누구라 하더라도 이 점을 모른다든지, 또 신비스럽게 느끼지 못하거나 경탄할 줄 모른다든지, 또 신비스럽게 느끼지 못하거나 경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으며, 그의 눈은 어두운 것이다. -아인슈타인,
해설-
아인쉬타인과 A- 슈바이처의 어록이다, 이들의 정신 세계는 일반인과 다르다, 지혜를 증득해야 비로소 진리를 통찰하는 어록이 생긴다, 이들은 지식을 배웠지만 부단하게 노력하여 지혜를 증득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지혜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를 든 어록만 봐도 저들이 어떻게? 세계의 지성으로 불리우고 선도적 역활을 하게 되었는지? 금방 알수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저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 위대한 지혜를 증득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시적 사고관인 지혜가 완성된 자들은 인식이 깨어서 상황과 변화에 부합하고 가치와 핵심을 유도한다, 시공간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지혜가 현명한 사고를 유도하며 전체를 관리하는 것이다, 저들의 공통점은 정상에서 아래를 보는 진리처럼 가치와 핵심을 요약하는 지혜의 눈을 가진 것이다, 누구라도 지혜를 증득하면 이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각자의 개성처럼 표현만 다를뿐이다, 나 역시 그러한 사고를 지녔다, 나는 가치와 핵심을 요약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인이므로 이러한 설명의 글로 재미와 호기심을 주지 못한다, 나의 말은 소설가나 작가의 그것보다 흥미가 없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구나 우리는 지식적인 말과 기능적인 환경에 습관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대가 알수만 있다면 좋은 말이나 글 일수록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것이 지혜의 가치이다, 이러한 내용의 글에서 화려한 말과 지식이란 쓸데없는 오해를 부르고 인식을 흐리기 쉽상이다, 시인의 사고( 한국의 시인은 지식인에 불과하므로 나의 글에서 제외한다, )는 확고한 신념을 통과하고 진실한 가치와 핵심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것만이 최고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지식만 아는 영재의 불행
어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명성이 자자했다, 마침내 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성공하였다, 그리고 성인이 된 어느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지금까지 자신은 남의 흉내만 내고 있었다!"고 고백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무릇 위대한 예술가란 아무리 재능이 탁월해도 자신을 아는 지혜가 없다면 독창성이 없게 마련이다, 지식은 기능적인 것ㅡ 지혜는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을 많이 알고 유창한 영어를 하며 어려운 고사성어를 줄줄 외우고 똑똑하다는 소문이 났어도 인성, 즉 인간적 가치가 발현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혜가 없는 그것은 남의 흉내만 내야 하는 짝퉁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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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분별력을 요구하고 지혜는 정신을 가름한다, 흔히 똑똑한 자는 말을 잘하고 현명한 자는 말을 바르게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정신을 가름하는 지혜가 없다면 스스로 말을 가려낼 만큼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말이라는 지식에 습관이 되어 객관적 사실로 간파하지 못한다, 처음에 말 머리가 언제부터 꼬리로 변하여 있는지도 간파하지 어렵다, 시간과 환경에 변하는 상황조차 고정된 재단을 하고 그것을 사실처럼 느끼고, 말로 인하여 오해를 부르고 착시현상에 빠지기 일쑤이지 않은가? 이러한 현상은 세월이 갈수록 분별력을 약화시키며 자신을 기만하고 위선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아이는 똑똑해야 하지만 어른이 되면 현명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똑똑하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청맹과니가 되는 줄 모르고 살아 간다, 그러나 지혜를 증득한 자에게 물어 보라ㅡ그들은 단 하루를 살아도 지난날의 삶으로 돌아 가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라는 지식을 깨우친 자로 암흑과 광명의 간극이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빠르고 복잡하며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무엇보다 언어를 분별하고 인간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현명한 자의 삶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신에 부여된 말, 즉 언어의 모순과 균형의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 알아서 풀어야 하는 숙명같은 것이다, 인간은 지혜를 모를수록 언어의 성질을 모르고 언어의 성질을 모를수록 스트레스를 야기한다, 스트레스는 미리 자각하고 경험으로 알수 있지만 우울증과 치매는 현재의 상태로 오는 것ㅡ 그것은 더욱 가혹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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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는 보다 편리한 언어라는 도구를 활용하고 지식에 습관이 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인식은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을 모른다, 언제나 지식은 욕망을 부추켜 가치를 비교하고 타성의 늪으로 인식을 유도한다, 지식이 욕망과 뒤섞이면 혼란과 갈등 속에서 허우적 거리기 마련이다, 그곳은 벗어 나려고 할수록 더욱 깊이 빠져 들고 만다,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는 지혜라는 현명한 도구를 모른다, 그러한 문제와 원인을 알려면 먼저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결코 회피하거나 잊혀지길 기대하지 말자! 어떤 것도 조금씩 다가서면 부담이 줄어 들고 서서히 적응하게 된다, 순수와 정직ㅡ그것이 처음의 시작이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내면과 외부가 일치하도록 보다 성실하고 진지하게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자 지혜로 들어가는 핵심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귀에 가장 먼저 다가 오지만 가볍게 여기거나 모르고 지나친다, 우리의 인식은 외부에 습관되어 내면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고 스스로 마음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만들지 못한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흥겨운 시간이 끝나면 인생의 어둠과 그림자는 찾아 오기 마련이다, 지식만 추구하고 행복하게 여기던 착각속에서 삶은 뒷통수를 맞는 것이다, 심신의 쇠약으로 확인되는 노년의 고약함, 혼자되는 고독과 번민, 망상, 끝없는 자기 부정 등의 정신적 손실이 늘어나고 의지는 흔들리니- 자신을 아는 지혜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공평 그리하여 진정 그대는 모르리라- 옆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도 슬픔과 고통을 감추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서글픈 자존심을! 누구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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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ㅡ" 종교는 미래를 이끌 수 없다! " 동아일보 기타기사참조 2013, 02,16
인류에게 종교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수많은 사람이 종교를 통해 삶의 위안을 얻고 있지만, 또한 수많은 사람이 종교 때문에 삶의 파탄을 겪고 있다. 굳이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뉴스에서 접하는 충돌과 분쟁의 상당 부분이 종교 간의 갈등이다. 그러한 갈등은 가까이는 이웃 간의 화합을 저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 대량살상을 야기하고 국제난민의 발생을 초래한다.그 원인이 종교라기보다는 종교로 포장된 정치적이거나 기타의 세속적인 욕망에 있다는 진단도 있다. 하지만 종교가 악용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수많은 종교 구성원이 그러한 갈등의 프레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할 수 없다. 망명 티베트의 지도자를 넘어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달라이 라마는 이 책을 통해 “종교는 더이상 미래를 이끌 수 없다. 이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고 선언한다. 불교라는 종교의 지도자인 그가 종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달라이 라마의 과감함과 솔직성이 있으며, 그 인격의 위대함이 있다. 종교가 아니라 특정 단체의 지도자라고 해도 그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한계를 넘어선다.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달라이 라마가 ‘종교를 넘어’라고 주장한 것이 종교를 무시하거나 인류에 대한 종교의 기여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역할을 지구촌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그 개별성으로 인한 한계를 인정하면서 재설정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종교와 보편적 도덕을 분리하자는 제안에서 뚜렷해진다. 개별 종교는 더이상 그 자체로는 보편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자체의 형이상학적 입장에 입각해 도덕을 확립하려는 시도는 이제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모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도덕의 확립을 통한 지구촌 인류공동체의 형성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그 보편적 도덕에 대하여 현세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현세적으로’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세속적 가치를 추종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그의 책 후반부는 불교적인 도덕을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실천할 수 있는 도덕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곧, 윤회나 업 등 현대적 합리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전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보편적 지성에 호소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다른 종교전통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불교로 개종하거나 불교적인 내용을 어렵게 배우려 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친숙한 전통을 소중히 하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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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달라이라마의 의도란?
세계 불교계가 존경하는 스승이자 현존하는 부처라고 불리우며 존경받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ㅡ 달라이라마, 그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달라이라마가 정신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쓴 책은 40여권이 넘는다, 그가 쓴 책은 세계 50여개국에 번역되어 400만권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중이다, 위의 기사는 달라이라마가 지구촌 사람들을 위하여 심사숙고한 끝에 발표한 내용이다, 그가 세계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나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통찰한 지혜로 풀어내는 탁월한 가치와 설득력을 보여준 내용 때문이다, 그의 글은 세계의 어떤 철학자나 정신분석 학자, 심리학자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가치와 핵심을 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혜로부터 발현되는 통찰과 직관이 예리한 분석과 명확한 설명을 유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혜를 증득한 자에게 최고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고 빠르며 현명하게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도록 유도할수 있을 것인가- 에 초점이 모아진다, 지혜를 증득하는 목적은 자신의 인성을 최고의 가치로 발현하는 것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방법은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대중화에 다름이 아니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이 지닌 종교적 가치와 핵심을 도덕적 가치와 핵심에 비교하고 지구촌 사람들을 위한 결론으로 가장 명확한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이 종교보다 도덕적 과정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신이 지도자로 있는 종교를 넘어 위대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의 지혜로부터 냉철하고 사려깊게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 도덕적 과정이 종교적 과정보다 쉽고 빠르며 현명하게 지혜를 증득하게 유도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종교보다 도덕이 인간의 미래를 열게 될 것이라고 결단을 내리고 세계에 공개 선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순종적이고 맹목적이며 절대적인 가치보다 시와 철학을 통하여 균형과 조화를 유도하는 도덕이 보다 인성의 자각성을 높이면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발전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달라이라마가 종교적 관점과 도덕적 관점을 비교한 것은 세계의 인문,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두를 포함한 전체적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지혜의 경지에 이르면 무엇이든 척보면 알아서 가치와 핵심을 현명하게 조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종교지도자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 양심을 지혜를 간파하고 가슴으로 새겨 들어야 한다, 실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지혜를 유도하는 가치와 핵심은 도덕의 핵심 즉 시적 사고관이라는 것을! 이처럼 위대한 지혜를 증득한 지도자는 자신을 넘고 종교를 넘어 인류를 위한 모든 면에서 자유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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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도덕의 바탕은 무엇인가?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양심이다, 양심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신을 탐구하는 철학이다, 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시이다, 달라이라마가 말한 방향은 도덕이지만 핵심은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사고관을 키워야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는 시인이 될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적 사고관을 지닌 위대한 달라이라마가 못다한 의도를 간파하고 스스로 알아 차려야 한다, 인문학의 핵심이 시이듯 종교의 핵심도 시로 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한국은 지식인이 쓴 시가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거나, 개인적으로 시를 쓰거나 혹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면 그들을 시인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은 세계 시인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시문학과 문학의 지도층은 시인에 대한 가치와 핵심을 잘못 이해하였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한국 시문학의 지도층은 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일반적 지식인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을 아는 만큼 남이 보이는 법이다, 이들의 시문학 수준은 세계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가치 평가를 하는 수준이 안된다, 세계의 시문학에서 일반적 지식인을 시인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따라서 국가의 인문학적 가치와 핵심을 정신적 발전의 시각으로 볼때, 지식인이 쓴 수준의 시를 시인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한국의 시문학 지도층 수준이 참으로 놀라웁고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국가에 정신적 가치이자 발전의 핵심인 시문학이 공론의 장인 매스미디어를 타고 버젓이,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정신문화 질서의 악순환을 유도하면서 짝퉁 시인들을 양산하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시인과 시문학의 현실이다, 우리는 시인에 대하여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세계 시인들의 공통점은 시인이란?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자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공인된 시인으로 평가한다. 세계적인 시인은 모두 여기에 해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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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불교계에 현존하는 부처라 불리는 양대산맥은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이다,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노벨평화상 후보자이자 세계 불교계의 상징적 인물인 틱낫한 스님은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는 결코 종교적 내용이나 종교적 어법으로 법문을 말하지 않는다, 시적 언어를 법문으로 활용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 한다, 그의 언어는 간단 명료하여 알아 듣기에 쉬우며 담백하기 그지없다, 마치 고요한 숲속에서 울리는 자연의 소리처럼 고요하고 순수하며 정직하게 다가온다, 어느새 시어가 가슴에 들어와 살며시 속삭인다, 누구라도 위대한 지혜의 경지에 오르면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처럼 시적이며 철학적인 사고관이 생긴다,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을 보아도 알수가 있듯이 위대한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면 인식의 가치와 핵심이 같다, 달라이라마는 철학적인 설법으로 유명하고, 틱낫한 스님은 시적인 설법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법문의 방식은 단지 각자의 개성일뿐 가치와 핵심을 보는 차이는 같은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노력하여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언제라도 무한하고 자유롭게 인식이 깨어 있어 최고의 상태에서 자신의 가치와 핵심을 드러 낼수가 있다, 누구라도 지혜의 경지에 오르면 그것이 가능하다, 그곳에는 걱정도 고민도 망상도 번민도 머무를 거처를 마련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적 소모가 거의 없다, 지혜가 스스로 자유자재하며 여과하기에 어떠한 스트레스도 최소한으로 줄어 든다, 더구나 생명이 끝날때까지 우울증과 치매도 없다, 언제이든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마음의 휴식처로 들어 갈수 있다, 시공간의 무한한 자유로부터 변화에 부응하는 독창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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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는가? 종교가 주장하는 "믿음"이나 "믿는다" 라는 말조차 불완전 형용사이자 불완전 동사"라는 것을? 물론 종교란 각자의 선택이고 자유로이 지녀야할 가치이다, 나는 종교를 예로 들지만 한편으로 종교를 이해하고 싶기도 하다, 나도 한때는 혹독한 우울증을 겪다가 도저히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종교를 찾아 나선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누구나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기에 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울증에 따르는 치매도 마찬가지다, 누구라도 그것을 지식과 종교, 웃음이나 유머 따위로 해결하지 못한다, 유머의 달인이라고 불리었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0년간 치매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론 레이건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정신을 잃어가는 것, 인간의 가치가 와해되는 것을 지켜 본다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며 회고하였다, 어릴때부터 똑똑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철의 여인 전 영국수상 대처도 그의 딸이 "9년째 치매를 앓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실로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문제가 되는지, 무엇이 가장 행복하고 완전한 것인지 진지하고 사려깊게 통찰해야 하리라! 노벨문학상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헤르만 헤세는 그의 시에 "당신이 행복을 찾아 나서는 동안은ㅡ 당신은 아직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록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 당신의 것이라 하더라도!ㅡ" 라고 하였다, “헤세는 인간의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는 것일까? 사실 그는 상황과 조건에 변하기 쉬운 행복을 말한 것이 아니다, 행복의 가치를 명료하게 아는 시인인 자신처럼- 누구라도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불행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이고 완전한 행복을 유도하는 현명한 방법을 알아야 한다, 실로 그것만이 품위가 있고 숭고한 인간다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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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교육은 다양한 지식을 배워서 스스로 적성과 재능을 발견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혜로 아는 교육자가 인성을 발현하게 유도하면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가치와 핵심을 찾아 간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야 자신의 개성과 자아를 추구하고 자질과 능력을 극대화 시키게 된다, 그것이 자유롭고 무한하게 독창적으로 만드는 인간 교육이다, 우리는 핀란드 교육만 보아도 알수가 있다, 핀란드 교육은 사회적인 지식과 인간적인 감성이 세밀하고 적절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인성 교육은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의 상태를 최고로 유도하는 지혜의 가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핀란드의 아이들 교육은 한국의 아이들처럼 바쁘게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지식만 쌓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혜를 아는 어른들이 가치와 핵심을 선별하여 지식과 지혜가 부합하는 최적의 교육을 유도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성인이 되어가는 시점에 조금만 동기 부여가 되어도 깨달음을 자각하고 지혜의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핀란드는 우울증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씨와 환경, 분위기가 그렇게 되기에 알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핀란드는 국가 경쟁력 1위, 교육 경쟁력 1위, 행복지수 1위,이다, 그들은 정신적 가치와 핵심을 유도하는 방향이 서로에게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최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혜를 깨달은 자들이 교육에서 가치와 핵심을 시적 사고관으로 유도하니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완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교육을 모르고 가치와 핵심을 모른다, 한국의 교육은 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남을 흉내 내기에도 바쁘다, 하나에서 열까지 선진국에서 발전되고 창조된 가치들을 들여와 기능만 배우고 익혀서 단순 모방에만 급급하다, 그것은 우리가 사고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후진적인 현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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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IMF 이후로 성장이 멈추고 퇴보가 진행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지식을 쌓을수록 표피적인 인식이 되어 적당주의와 기회주의에 빠지기에 알맞게 된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사회 지도층이 되면 인식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질이 떨어져서 남을 모방하거나 착취하는데 습관된다, 더구나 한국은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유교 문화를 이어받아 무지의 악순환에 빠지기도 쉽다, 따라서 한국의 교육에 선진국의 교육을 체화시키는 것도 대안의 방법이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이미 한국의 지도층이 기득권 패거리를 형성하고 아래 계층에 기생하는 방법에 면역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한국은 정신문화가 발전하는 방법을 모른체 대를 이어 왜곡된 바탕을 이어가고 있다, 위대한 지혜를 모르는 나라는 각종 부작용과 후유증을 양산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이 선진국이 될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부단한 노력으로 증득하는 지혜처럼 단 한번만 완벽을 추구하고 일단 들어가면 영원히 지속이 되는 선진국, 언제까지 한국은 변방의 북소리만 낼 것인지 난감하다, 미래는 혁신과 창조가 발전의 가치로 나타나고 그러한 가치와 핵심은 지혜에서 발현되지만 오직 지식만이 최고라는 풍토에서 준비가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계시를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그것을 선도적인 정신문화로 유도하고 인식에 체화를 시키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인간은 언어를 도구로 살아 간다, 인간과 자연을 함축한 가치와 핵심이 바로 시이다, 우리는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야 새로운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러나 한국은 그러한 방법을 모르고 선진국의 가치와 핵심을 모른다, 선진국이 되려면 기존에 지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지혜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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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소통과 감성의 대가로 불리우는 시인이자 소설가 이외수, 한국에서 가장 많은 팔로우로 트위터 대통령이라 불리는 그가 어떤 책에서 유난히 강조한 문장이 생각난다, "그대여 부디 시ㅡ 속에서 살아라!" 고 당부한 것이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이다, 그가 만든 어록은 자신이 증득한 지혜로부터 나온다, 전체를 핵심으로 요약하고 가름하는 발원지가 지혜를 증득한 시적 사고관이라는 것을 자신이 알기에- 우리에게 인생의 한번쯤은 시와 같은 삶을 살아 볼 것을 당부한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내가 우연하게 시를 접하고 새로운 지혜를 증득한 후에야 그 말을 돌아보고 비로소 의도를 알았던 것이다, 그는 시로부터 감성을 위한 훈련을 하고 본능적 의지에 다가서야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에게 본능적 의지를 세우고 감성의 힘을 불어 넣는 원동력은 시이다, 왜냐하면 인식을 자각하고 깨우침을 유도해서 인간의 완성을 유도하는 것이 시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대여!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라, 좋은 사람은 좋은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그대가 어둠의 절망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 그들의 말 한마디는 희망의 등불이 되어 준다, 지혜를 증득하는 시인이 되려면 어떠한 자격이 필요할까? 그대여 놀라지 마라 - 단지 보통의 지능만 있으면 된다, 시인, 그것은 본인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을뿐이다, 나처럼 지능이 떨어지고 지식이 없어도 되지만- 그렇다고 지능이 높고 지식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세계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지식이 없었다는 것을 유념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누가 명확하게 알수가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가? 지혜의 성, 그곳에는 인식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알려면 우리도 지혜의 경지에서 통찰과 지혜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정신 세계는 지혜를 증득한 시인과 철학자, 성인 등이 가치와 핵심을 선도하면서 발전한 것이다, 미래의 시대 또한ㅡ 그렇게 예정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시도를 하려면 무엇보다 인문학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지혜를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먼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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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시자이자 빌게이츠는 "지금까지 자신을 만든 것은 인문학"이라고 정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혁신과 창조의 리더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인문학과 과학의 교차점"을 주장하였고, 페이스북의 창시자 마이크 주커 버그도 "인문학이 창조의 발상지"라고 주장한 것이다, 혁신과 창조에서 세계 최고의 가치와 핵심을 보여 주었던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대학교 중퇴자라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한 인문학은 그동안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웠던 지식이 모자라서 후회가 되거나 미련이 남아서 우리에게 인문학의 지식을 배우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대학교를 중퇴한 후에 더 많은 지식을 원하지 않았고 보다 특별한 지식을 배우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문학의 지식보다 인문학의 지혜를 통하여 시적 사고관이 완성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인문학의 가치와 핵심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인식이 최고의 가치로 발현되는 인문학의 지혜를 배우라는 의도이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자신의 가치를 떨어지게 유도하고 세월이 갈수록 불행하게 만들기에 인문학의 지혜를 증득해서 현명한 차원으로 높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의 핵심적 정의가 바로 시- 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시적 사고관의 지혜를 증득하면 자신처럼 될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한 핵심과 최고의 관점은 지식과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와 통찰의 문제라는 점이다, 우리는 인문학의 지식보다 압축적 가치인 지혜의 시를 정신문화에 접목해야 한다, 참고로 이들이 노력하여 만든 천문학적인 부는 최소한의 것만 자식에게 물려주고 모두 사회로 환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의 인성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내가 앞에서 설명을 하였듯이- 지식만 배운자는 그러한 생각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러한 지혜가 나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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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기의 기능에 대하여
세계는 왜 스티브잡스에게 열광하는가?
( 인터넷 정보 )
현 시대의 I,T 신화와 창조의 아이콘은 스티브잡스로부터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세계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I,T를 비롯한 미디어 업계는 물론 출판, 신문까지 혁명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가 만드는 새로운 작품들은 세계에서 날개 돋친듯 팔리고 있으며 다음에는 무엇이 창조되어 나올지 세계가 집중하고 기대하고 있다, 그가 일으키는 혁신의 바람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창조적이고 혁신적 CEO의 대표주자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시- 읽기를 강조하는 CEO로도 유명하다. 일상에서 젖는 습관적 사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시 읽기’를 꼽는다. 그는 생각이 막힐때 시- 한줄에서 답을 ?는다고 한다,
참고
우리는 스티브잡스가 주장한 시읽기를 오해하거나 착각하기 쉽다, 그가 말하는 시읽기란- 시에서 아름다움을 감상한다거나 센치한 감정에 빠지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스티브잡스가 의도하는 핵심은 "시읽기로부터 다양하고 세밀하게 분석하는 이른바 "인식을 여과하는 과정!" 을 의미한다, 그는 단 한편의 시를 읽더라도 다양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헤아리는 여과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한 시읽기 과정을 통하여 인식을 여과시키면 다시금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던 경험을 자신이 알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이 정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가장 효과적이란 것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기에 우리에게 시읽기의 "과정을"권하는 것이다, 그가 한줄의 시에서 답을 찾는다는 말도 결코 시에 답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시읽기 과정이 지혜를 유도하여 현명하게 "답을 찾게 만든다"는 것을 의도한다, 그는 시읽기를 통하여 정신을 맑게 하고 지혜를 유도하는 필터의 기능으로 "시읽기의 과정"을 활용한 것이다, 그가 시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자신처럼 지혜를 증득한자도 일상의 문제와 이해관계의 타성적 흔적이 묻어나기 마련이므로, 보다 짧은 시간에 시읽기의 과정을 통하여 최고의 상태로 돌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시읽기를 하는 과정에 인식이 자각의 길을 지나면 어느새 맑고 밝으며 새롭게 정화되어 있는 것이다, 스티브잡스는 시읽기를 통하여 언제나 최고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였고 세계적인 시인과 같은 지혜의 경지에 있었다, 스티브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대 연설에서 암투병을 소개한 일이 있다, "내가 (암으로 )죽음에 직면했던 경험은 이후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선 모든 것들, 실패의 두려움이나 부담감과 같은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고 진실로 중요한 것이 남기 때문에" 라고 말했다, 나는 스티브잡스가 죽음에 직면하기 훨씬 이전에 우울증을 앓은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은 암이라는 병이 생기면 심신이 쇠약하고 죽음부터 생각하므로 감정이 주눅들면서 우울증이 오기 마련이다, 더구나 죽은 후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혼란은 인식의 장애를 일으키고 감정은 눌리게 하여 우울증을 부르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스티브잡스는 슬픔과 고통의 바닥인 그곳에서 냉철하고 사려깊게 자신의 가치와 핵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곧 죽는다는 두려움과 공포, 슬픔과 고통을 부단한 노력과 인내로 자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바라 보는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위대한 지혜를 증득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으며 무한하고 영원한 인식의 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그가 인간의 죽음조차 삶이 만든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찬미한 것은 가치와 핵심을 분별하고 인식의 영원까지 통찰하는 시적 사고관ㅡ 즉 지혜의 경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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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낭송하거나 외우는 방법은 어떤가?
시를 낭송하고 듣거나 외우는 방식은 일종의 형식이고 쑈일 뿐이다, 그것은 교육적인 방법도 아니고 현명한 방법도 아니다, 이같은 현상은 지식인이 말하기 쉽고 듣기 편리한 지식을 시로 표현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단지 지식만 아는 시인과 그러한 수준의 평론가들이 추구하던 상업적 공생 관계가 맞물려 수준이 낮은 지식의 시를 양산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한국의 시처럼 지혜를 모르고 쓰는 지식인의 시는 언제나 잔머리를 굴리고 말장난의 수준에서 머무르기 마련이다, 한국의 시처럼 내용이 쉽고 단순하며 이해하기 편리한 시는 주의 깊게 분석하거나 연구할 가치가 없는 관계로 시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고 효과도 반감되어 인식을 흐리게 하고 자각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시는 새로운 지혜가 담겨 있어 우리가 쉽고 간단하며 편하게 알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세계의 시인들은 시를 쓸데 수많은 노력과 고뇌, 자기 성찰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단어 하나에 철저하고 완전한 진리를 담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따라서 세계시는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무한한 진리를 밝히는 정신적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시는 읽는 자에게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은 자세로 시인의 의도를 밝히는 과정을 요구한다, 세계적인 시인들은 각자의 개성이 명확하듯 시의 내용과 테크닉도 크게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자, 그들의 시는 내용이 간단하고 쉽게 보여도 최고의 지혜가 담겨 있고, 시의 내용이 길고 어렵게 보여도 최고의 지혜가 담겨 있다, 세계적인 시는 보다 깊이 헤아리며 다양하게 분석하고 많은 연구를 할수록 인식이 자각할 것도 많은 것이다, 우리는 지혜를 체득해야 하기에 보다 내용이 깊고 어려우며 무한한 진리가 담긴 시들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한 세계시가 인식에 자각이 되고 사고의 발전이 되도록 도와 준다, 그러기에 지혜를 모르는 자는 사고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시를 활용하고, 지혜를 증득한 자는 인식을 닦아 내는 도구로 시를 활용하는 것이다, 세계시는 무한한 자연과 인간의 지혜를 함축하고 있기에 부단한 노력과 이해로 인식의 자각과 변화를 일으키며 사고의 지속성을 따르도록 유도한다, 사실 어떤 세계시는 시 읽기의 과정에서 한번의 호흡이나 단 한번만 생각을 놓쳐도 이해가 연결이 안되어 처음부터 시를 다시 읽어야 할 정도로 집중과 통일을 반복하게 만든다, 세계시는 언제라도 최적의 정신 상태를 유도하는 지혜의 성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시를 배우는 자는 시를 선별하는 과정부터 지혜를 증득한 자에게 시의 가치와 핵심을 분별하는 지도를 받는 것이 현명하다, 왜냐하면 지혜를 증득한 자는 시를 배우는 자에게 적절하고 필요한 때에 지혜의 길로 인도하는 마중물 역활을 할수가 있는 것이다, 선진국의 대학은 시문학을 공부할때 반드시 지혜를 증득한 자가 시의 가치와 핵심을 자각하게 만들어 새로운 지혜의 길로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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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는 어떻게 하는가?
시 쓰기는 시읽기 내용을 역으로 살펴 보면 보다 현명하게 방법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지혜의 경지를 증득하기 전에는 완전한 시를 쓸수가 없기 때문에 꾸준히 연습만 하는 것이 좋다, 세계시를 살펴 보면 한결같이 자신의 벽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 무한하고 자유로우며 영원을 추구한다, 세계 시인들 중에 지혜를 증득하지 못한 자는 단 한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누구라도 지혜를 증득한 후에 시를 쓰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게 된 후에 시 쓰기를 시도해야 세계 수준의 시를 쓸수가 있고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법이다, 오직 그것을 유념하라- 지식만 아는 자는 인성이 발현되지 못한 관계로 가치와 핵심을 분별하지 못한다, 따라서 시를 쓰는 방법으로 인식을 훈련하고 자각하면서 새로운 지혜를 체득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를 중득한 자로부터 냉철한 비교와 분석, 검증과 비판을 받아야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지혜를 체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 읽기를 지혜로 알아야 하듯이 시 쓰기도 지혜로 배워야 냉철하게 자각하고 바르게 성찰하면서 구체적이며 객관적으로 인식에 반영이 된다, 시 읽기가 그러하듯이 시 쓰기도 인식이 분별하면서 사고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시 쓰기를 통하여 인식의 수렴과 확장을 반복해야 사고가 발전하고 지혜가 확장되므로 시를 쓰는 자는 그러한 과정에서 훈련하고 적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지혜의 시적 사고관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시 쓰기도 지혜를 증득한 자로부터 마중물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 쓰기가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담지만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을 담지 못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지혜를 모르고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에게도 도움이 안된다, 지식만 아는 지식인이 시를 써 상업적 발상으로 시집을 내 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를 무지하고 부패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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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정신문화 수준을 살펴 보면 시의 가치와 핵심이 그 나라의 정신문화 수준과 한계를 반영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한국의 부패지수는 객관적으로 볼때 세계 240여개국 중 70위 수준으로 판명된다, 나의 견해로 한국의 시가 세계 240여개국 중 70위 수준으로 평가되는 것은 상관관계가 명확하다, 사실 정신문화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가치와 핵심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국의 시인과 평론가들이 아무리 한국의 시를 고상하게 포장해서 변명을 해도 질과 수준은 그대로 드러나기에 그들은 주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지혜의 눈을 가진 자는 누구라도 의도를 볼수가 있고 가치 평가를 할수가 있는 것이다, 세계시의 수준과 한국시의 수준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가 되면서 시의 가치와 핵심도 간단 명확하게 가름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시는 더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 매우 우려된다, 한국의 시를 살펴 보면 대부분 지식인이 쓴 것으로 이들이 사물과 현상을 보는 수준은 지식과 지혜조차 분별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시인이나 지식인이 세계 시의 수준과 가치를 모른채 혼자만 항아리 속에 도취되어 시를 쓰기 때문에 나타나는 후진적 현상이다, 이들의 시는 대부분 자연 환경을 그대로 옮겨 놓는 내용이거나, 자신의 허세와 가식, 우월감, 또는 혼자만 착하고 고상한 척- 하는 따위가 인식이 습관되어 시로 노출된 것이다, 아직도 그것들이 학생들의 교육환경으로 연결되어 정신문화의 가치와 핵심으로 쓰이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시의 가치와 핵심이 나라의 선도적 역활을 하는 정신적 도구로 혁신과 창조를 주도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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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정보 )
NYT, 대학 문집에 실린 시 2편 소개- 오바마 부상 뒤엔 문학적 재능 있었다”
오바마가 쓴 시집은 미국에서 300만부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NYT는 “오바마는 어떤 정치인보다 잘 쓰여진 이야기의 힘을 아는 인물”이라며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부상한 것은 그의 정치적 경력보다는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학적 재능에 힘 입었다”고 전했다.
그의 "아버지" 라는 제목의 시- 에는
나와 무엇을 하려는가, 애야/ 편안한 삶을 살아/세상의 표피와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면서/’ 라는 부분이 나온다.
설명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에 관한 시는 인터넷에 한 문장만 나와 있어 아쉽지만 여기에 인용한다, 오바마는 젊었을때 시집을 낼 정도로 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찌기 그는 시를 통하여 가치와 핵심을 분별하는 인깃의 발전 과정을 거친 것이다, 오바마에 대한 가치와 인간적 평가는 이러한 시 한문장만 보아도 금방 알수가 있다, 그는 시를 통하여 인식을 훈련하고 사고를 확장시키며 시적 사고관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위의 기사에서 기자가 주장하는 재능에 대한 문제는 다시금 살펴 보아야 한다, 흔히 부모에게 유전자를 물려 받듯이 정신도 재능처럼 물려 받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 특성을 닮은 유전자에 불과할 뿐이다, 정신적인 재능이란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기의 아인쉬타인을 자식이 닮을수 없듯이 오바마의 자식도 부모의 정신을 닮을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닮은 것이 있다면 아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이거나 조건과 환경에 따른 습관일 뿐이다, 위의 시를 보면 아버지의 충고가 오바마의 정서와 가치관에 영향을 준 것을 알수가 있다, "편안한 삶을 살게 되어" 란 부분의 해석이다, 언제나 편안한 삶을 살게 되면 불편한 것을 모르고, 사는 것에 불편한 것을 모르면 오히려 편안한 삶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그같은 습관으로 인식이 면역이 되고 스스로 타성에 빠지게 만든다, 결국 더욱 편한 것만 찾다가 표피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보다 가치 있고 핵심적인 삶조차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식의 타성과 이미지는 끝없이 탐욕을 추구하고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바마는 이러한 인식의 습관을 간파하고 타성적인 삶에서 깨어 있으려고 부단하게 노력한 것이다, 인간은 도덕적 양심과 시적 행위를 통하여 부단하게 노력하고 자각해야 현명한 지혜를 증득한다, 오바마가 백인이 주류를 이루는 정치권에서 극소수에 속하는 이민계 태생인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 갈수 있었던 원동력은 위대한 지혜를 유도하는 시적 사고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선진국의 대통령은 기본적 가치인 인간적 자질과 도덕적 능력을 철저하게 검증을 받는다, 오바마는 시적 사고관의 지혜로부터 객관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지은 앙망성공(仰望星空)이란 시가 7일 시작된 2010년 베이징 대입시험 가오카오(高考)작문 문제의 주제로 출제됐다고 중국 반관영 통신사인 중국신문사가 8일 보도했다.
원자바오 총리의 시는 인터넷에 제목만 나와 있다, 미국의 오바마와 중국의 원자바오 같은 국가 지도자들이 시를 한때의 취미나 호기심 정도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삶에서 시라는 도구를 보다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더구나 이들은 시를 쓰는 차원이 되면서 정신적 가치와 핵심을 추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적 사고관을 지닌 자는 가치와 핵심을 간파하고 있기에 각각을 주도하고 선도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자신을 모르고 인간을 알수가 없듯이 인간을 모르는 자가 정치를 한다는 것은- 수준과 한계가 낮아 저질의 정치를 의도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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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 ( 인터넷 정보 )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 미시시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가난함이 싫어 파출부 일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밀워키로 이사했지만 가난함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9살 때 삼촌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한 뒤로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14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가 몇 개월 만에 죽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게다가 그녀는 마약을 한 경험이 있고 비만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오프라 윈프리는 모든 것을 뛰어 넘어 정신적인 면으로는 어느 대학 총장이나 정치가, 종교적 지도자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한 그녀가 추천하는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오프라 윈프리의 나 자신 되기
"당신은 알고 있나요? 당신은 정말 많이 변했어요. 더욱 더 당신 자신이 되어졌군요." 그건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정말 하도록 하는 것이죠. 더욱 더 우리 자신이 되도록. 그리고 나는 믿어요, 당신이 수행하고 경험한 모든 것들 안에 교훈이 있고, 그 교훈을 통해서 당신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요. 그것은 당신의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죠. 그리고 나를 믿어봐요. 나는 내적 지혜를 얻는 것이 부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더 많이 경험할 수록 당신은 더 얻게 되죠.
조앤 롤링(영국의 작가),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7년 동안 엄청난 실패를 겪었습니다,이혼, 실업자에 가난까지. 하지만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면서 실패가 내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 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일에 쏟을 수 있었습니다. 실패로 인해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실패했지만 나는 분명 살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타이프라이터가 있었고, 무엇보다 지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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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와 조앤 롤링,
알다시피 이들의 발전과 성공은 지능이 높아 똑똑하거나 혹은 배운 지식이 많거나 어쩌다 행운처럼 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삶에서 온갖 좌절과 역경을 겪었다, 슬픔과 고통은 인생의 한때를 지배하였고 우울증은 삶의 바닥을 강요하였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 충동을 겪었다고 하였고, 조앤롤링은 가난에 쪼들린 싱글맘으로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다, 내가 지적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이들이 세계의 어디에서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 살았던 간에 삶에 대응하고 문제에 적응하는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 다르지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살을 결심하기 전에 우울증이 오기 마련이다, 슬픔과 고통으로 절망의 바닥이 다가오면 누구라도 감정이 억눌리고 우울증에서 헤매이게 마련이다, 어떻게든 우울증을 벗어나려고 방법을 찾아 보지만 사막의 늪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 거릴 뿐이다, 이러한 경우 더러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기만 바라는 사람이 있고, 더러는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의 진단을 받고 약물을 처방하지만, 더러는 의지가 한계에 이르러 종교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더러는 우울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소모적이거나 극단적으로 대처하면 우울증이 나아도 자신을 위한 가치가 되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나아진 것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도 더이상 발전의 가치는 기대할수가 없게 된다, 이들은 우울증이 나아도 결코 안심을 할수가 없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만든 우울증은 언제라도 변하기 쉬운 생각을 이전의 상태로 유도하고 재발하도록 현혹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울증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식인은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수가 있다면 우울증은 인식에서 가장 바닥이다, 마지막 방어기재가 작동하는 곳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우울증은 바닥을 확인하도록 준비된 곳이기에 보다 높은 곳이 약속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다 냉철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우울증을 벗어 난다면 자신의 인식을 보다 휙기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꿀수 있는 자리이다, 왜냐하면 가장 낮은 바닥에서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기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을 유념하라- 스스로 인식의 바닥을 확인한 자는 무한하게 높은 그곳까지 올라가게 되지만- 스스로 인식의 바닥을 확인하지 못한 자는 언제나 허우적 거리고 내려가는 길만 확인이 될 뿐이다, 오프라 윈프리와 조앤 롤링은 자신에게 다가온 우울증을 부단한 노력과 용기로 인내하면서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우울증을 현명하게 대응하고 극복하는 자세로 인식의 바닥을 딛고서 마침내 자신을 알고 무한한 지혜까지 증득한 것이다, 이들에게 인과응보의 법칙, 즉 시도하고 대응한 만큼의 노력과 설득력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방송에서 오프라 윈프리가 책을 선별하고 추천하는 이유도 지혜에서 나오는 분별력과 통찰 덕분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우울증을 겪었던 과거가 "부끄러울 게 뭐가 있느냐"며 "나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것을 극복 해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조앤 롤링은 하버드 연설에서 "삶의 밑바닥이 인생을 세울수 있는 가장 단단한 기반" 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의도이다, 왜냐하면 우울증과 같은 삶의 바닥에서 자신의 의지를 신뢰하고 바르게 극복하며 일어서야 비로소 위대한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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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정보,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는 최근 심리학자 리자 메초이안은 “똑똑한 여성이 우울증 걸린다”고 그가 쓴 책에서 주장했다,,,이어 예일대 심리학자 수잔 놀른-혹스마의 책 ‘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Women who think too much)’를 인용해,,“여성이 남성보다 무엇이든 더 많이 고민하고 꼼꼼히 따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쉽게 우울증에 걸린다”고 설명했다. 정신 분석학자 놀른 혹스마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이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짐작과 부정적인 추측을 하는 등 과도한 생각을 하는 것을 하나의 병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것은 보다 현명한 주장이 아니다, 인간에게 우울증은 공통된 현상이다, 똑똑하거나 바보이거나 생각이 많거나 적거나 관계가 없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라는 말처럼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예외 없이 겪게 되는 병적인 증상이다, 단지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고통의 깊이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어떤 자는 짧게 어떤 자는 길게 느끼며 어떤 자는 고통이 약하고 어떤 자는 고통을 깊게 느낀다, 그러나 우울증이 바닥에 이르면 느끼는 고통의 정도와 깊이는 같다
인터넷 정보를 뒤져 보니 위대한 사람들 중에 우울증이 걸린 사람들이 수없이 나온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버지니아 울프, 미식축구 선수 라이오넬 엘드리지,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 오페라 가수 이탈리아의 게타노 도니제티,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세계적 문호 레프 톨스토이, 불세출의 소련 남성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 영국의 시인 존 키츠,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만유인력의 아이작 뉴턴,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 천재적인 과학자이며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영국의 명재상 윈스턴 처칠, 영화배우 비비안 리, 미국의 야구선수 지미 피어설, 최연소 오스카상 수상 배우 패티 듀크,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찰스 디킨스. 기타 등등 모두 열거를 할수 없을 정도이다, 대부분은 자신이 감추었던 우울증이 우연하게 드러났거나 오랜 고통을 못견디고 스스로 고백한 경우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이 고통스러운 병을 피하고 싶다."고 한 빈센트 반고흐,,"내가 이 병에 걸린 건 정말 내 잘못이 아니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수 많은 다른 사람들 생각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의 한 부분이다. 윈스턴 처칠은 불안한 억제형 우울감에서 탈출하기 위해 유화를 그렸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my black dog (나의 검은 개)"라고 하였다.
처칠은 유화를 그리면서 검은 개가 사라져 가기를 기다렸다. 또, 미국의 소설가 호손은 우울증으로 12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버렸다. 무슨 일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나 자신을 감옥 안에 감금해 버렸다. 이곳에서 나 자신을 꺼내 줄 열쇠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절망적이었던 호손은 우울증이 호전된 후 계속해서 걸작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우울증으로 인하여 오랜 동안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그러나 우울증을 극복한 뒤에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획기적이고 창조적으로 높이는 발전의 도구가 되었다, 이들은 우울증을 극복하는 현명한 자세로 부단하게 노력하고 인내하면서 명료한 그길을 따라 갔으며 마침내 지혜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뽑은 링컨의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저명한 역사가 조슈아 울프 쉥크는 링컨의 우울증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링컨의 우울증은 가벼운 역사의 에피소드로 취급 됐을 뿐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과 어린 나이에 여읜 어머니에 대한 연민,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심리학적 분석이 대세를 이뤘다. 쉥크는 우울증이야말로 링컨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링컨의 우울증은 매우 심각해 실제 26세 때와 32세 때에는 거의 자살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며 "링컨은 (우울증 환자)의 참담함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했다"고 지적했다. 쉥크는 "바로 이 노력이 그를 빈농의 아들에서 변호사, 국회의원, 그리고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美 역대 대통령 절반이 우울증이 걸렸다고 고백하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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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연합뉴스) 김현 통신원 =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전 미국 대통령이 시(詩)를 좋아하고 또 시를 직접 쓰고 싶어하는 열망이 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새로운 문건이 확인됐다.
"링컨은 시 애호가"..우연히 드러난 새 면모
옛 저택의 벽서 발견된 편지 작성 주인공 확인으로 드러나!
4일(현지시간) 시카고 언론에 따르면 링컨 대통령 기념도서관 측은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에 있는 링컨 대통령의 집 내벽에서 발견된 167년 전 편지의 작성자를 마침내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편지는 1987년 링컨 대통령의 집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할 당시 부엌 한쪽의 쥐구멍에서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인부들에게 발견됐다. 링컨이 1844년부터 1861년까지 17년동안 살았던 이 집은 링컨이 생애 유일하게 소유했던 집이기도 하다. 링컨은 존스턴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1846년 2월 25일 시를 써보냈다. 존스턴은 이 시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퀸시 휘그에 게재했다. 링컨이 유년시절 살던 인디애나주 남부의 집을 찾아가 추억을 회상하는 다시 찾은 내 어릴적 집 (My Childhood-Home I See Again)과 링컨 친구의 이름을 딴 매튜 젠트리(Matthew Gentry)가 바로 그 시다. 이번에 확인된 1846년 3월 10일자 소인 편지는 존스턴이 링컨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보낸 것으로 "이 시를 직접 썼느냐"는 질문이 포함돼 있다. 링컨은 4월 18일 존스턴에게 답장을 하면서 "직접 쓴 건 아니다. 만일 내가 내 생각대로 이렇게 멋진 시를 쓸 수 있다면 내 재산 전부를 걸겠다"며 누군가에 의해 대필된 사실을 고백했다. "이번 확인은 편지 필자를 찾았다는 점 이외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링컨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며 "링컨이 시를 좋아했고 직접 시를 쓰고 싶어했으며 이를 위해 노력했다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스토웰은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문서들은 대부분 소각되고 남아있지 않다"면서 "이 편지는 어떤 이유에서건 벽 안으로 들어가 있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기타기사참조 201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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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열거한 저들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더러는 우울증의 바닥에서 주저 앉았거나, 이들 중 더러는 스스로 일어서는 방법을 선택하였고, 더러는 막연한 종교를 찾아 신의 기적을 원하였고, 더러는 인성을 발현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일단 우울증을 겪는다는 상태는 자신을 모르고 지혜를 모른다는 반증이다, 이들은 아무리 명성이 있고 똑똑해도 지식만 배운 지식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똑똑한 것과 현명한 것은 전혀 별개의 성질이다. 그것은 암흑과 광명의 삶으로 비교가 될 정도로 간극히 나타난다, 내가 인터넷 정보로 이들을 열거한 숫자보다 안밝힌 숫자가 많다는 것을 주목하면 인간에게 우울증은 공통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할수가 있다, 따라서 프로이드는 인간은 누구나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아인쉬타인은 인간의 미래는 마음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프로이드와 아인쉬타인의 문제 인식은 같은 곳에서 출발하여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우울증의 바닥에서 자신의 내면을 딛고 스스로 일어선 자들은 새로운 차원의 정신 세계인 지혜로 들어가게 된다, 누구라도 그곳에 도달하면 알게 되리니- 자신의 가치와 핵심을 현명하게 관장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위대한 지혜라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반전의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
다시금 강조한다, 위에서 열거한 자들의 공통된 점은? 우울증으로 인하여 삶의 바닥을 강요 당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외부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부단하게 인내하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냉철하게 정신 세계를 헤아리고 가치와 핵심을 추구하는 시적 사고관의 지혜를 증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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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확장에 대하여
사실 나는 사십세가 되기까지 책을 가까이 하거나 읽어 본 적이 없다, 애초부터 책은 내용을 어렵게 생각하고 부담이 생겨서 흥미도 호기심도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세계시 한문장을 읽고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오랜동안 한권의 시집을 헤아리며 분석하고 집중하면서 새로운 지혜를 체득한 것이다, 이후에 오십 여권의 세계 시집과 한권의 철학서를 읽어 보았다, 그러나 시집 한권 읽기가 끝난 이후부터 그러한 책들은 더이상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나중에 읽은 오십 여권의 시집과 한권의 철학서는 내가 아는 것을 다시금 검증하고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가치와 핵심을 보는 방법이 같았으며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도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지혜를 통찰하는 기본적인 원리와 방법이 같았던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읽은 50여권의 시집과 철학서는 나의 사고가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무한하게 확장된 것을 다시금 검증하고 확인하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처음부터 주의를 주었듯이 그러한 결과조차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즉 세계시를 통하여 지혜를 증득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으로 아직도 반의 과정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실로 나머지 반의 과정이 중요한 것은 이후에 내가 지혜를 증득하고 알았다, 그것도 모르고 가던 길을 멈추고 우월감에 도취하여 우쭐-거렸다면? 나는 얼마나 창피를 당하고 몸둘바를 모르게 되었을까?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아찔하고 등골이 서늘할 정도이다, 아직도 나는 어두운 생각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보다 자세히 설명을 하겠다, 일단 세계시를 예)로 들으며 인식의 확장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 간다, 인용한 세계 시집은 집에 있던 것으로 니체의 시 ( 민음사 ) 헤르만 해세 ( 나나 ) 노벨문학상의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문학 동네 ) 오쇼라즈니쉬 배꼽, ( 예지원) 등이다, 지면상 짧은 시만 몇가지 예) 로 들고 설명을 붙인다,
참고
시는 지식으로 보는 방법과 지혜로 보는 방법이 있다,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시를 이해하며 보는 방법이 있고, 자신의 증득한 지혜를 통하여 시를 이해하며 보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지식만 아는 자가 자신이 아는 범위와 한계에서 보기 때문에 시의 가치와 핵심도 지식으로 제한이 되고 한계의 이해로 머문다, 대부분의 한국시와 시인들, 평론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후자는 지혜를 증득한 자가 지식과 지혜를 활용하며 시의 가치와 핵심을 무한하게 이해한다, 세계시와 세계적인 시인들 세계적인 평론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여기서 우리가 보다 주의할 점은 지식만 배운자는 단지 자신이 아는 지식의 범위에서 한가지 방법으로 시를 보고- 지혜를 증득한 자는 지식과 지혜 두가지 방법을 활용하며- 시를 비교하고 분석하며 평가할수가 있는 것에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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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행을 떠나 보자!
( 니체 )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
돌아가지도 않겠는가, 올라가지도 않겠는가.
영양이 다니는 길도 없는가,
그렇게 나는 여기에 기다리고 있다,,
눈으로 보고 손에 잡히는 것일랑 꽉 붙들고
다섯 자 넓이와 아침 노을,
그리고 발아래 세계와 인간과 그리고 죽음!
해설
이 시를 읽어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너무 간단해서 이해하기 쉬운가? 혹은 무슨 내용인지 어려워서 모르는가? 이 시를 보면 누구라도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을 하는 나그네를 떠 올리거나? 삶의 바닥으로 내 몰린 나그네의 서글픈 심정을 생각하지 않은가? 물론 시를 읽는자가 그러한 생각, 또는 사진이나 조각, 그림 한폭을 떠 올려도 무방하다, 누구라도 이러한 시를 읽으면 자신이 아는 지식의 범위와 한계에서 이해하게 마련이다, 즉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자신이 아는 것보다 가치와 핵심을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 시는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일단 설명을 읽고 그것은 천천히 한번 더 생각을 해보기로 하자, 시를 볼때는 단어 하나마다 왜? 어떻게? 무엇이? 란 질문을 끝임없이 던지고 보다 냉철하고 집요하게 의도를 파악하면서? 시인이 의도한 가치와 핵심에 집중해야 한다, 시를 이해할때 시인의 의도를 99%를 알고 1% 몰라도 시를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현상이 지식만 배운 자와 지혜를 증득한 자의 차이다,
이 시는 한국의 시인들이나 문학 평론가, 또는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가 보아도 간단하게 읽은 것 이상은 얻어 낼 것이 없다, 그들은 언어라는 지식은 알아도 언어를 깨우친 새로운 지혜를 모른다. 그들의 인식은 이 시를 읽는 순간의 아는 것으로 그칠뿐 더이상 이해를 넓히거나 생각할 것이 없게 된다, 그들에게 a는 a라는 것을 배운 지식으로 알아도 a가 무한하게 될수 있다는 지혜를 배운 적이 없다, 그들은 지식과 상식만 배웠고 앵무새처럼 그것만 되뇌이고 가르칠뿐이다, 자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에서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한 스티브잡스, 그는 이 시를 어떻게 보게 될까? 그는 자신이 "필터가 없는 사람" 이라고 말하였다, 척보면 안다, 물론 a에서 무한을 포함하고 그중에 핵심을 알게 된다, 그는 지혜를 증득한 자로 주장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시를 읽어 가면서 시인의 내면과 일체를 이루며 시의 가치와 핵심을 간파한다, 그의 인식은 지혜로부터 나오는 통찰과 직관이 준비되어 다시금 헤아리고 반복하는 이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척보면 아는 것이다, 일반인과 다른 지혜의 사고를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브잡스가 그렇게 대단한가? 그것은 아니다, 그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보다 먼저 지혜를 증득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시에 대한 설명을 아주 짧게 할수도 있지만- 일단 보다 많은 예)를 들어 충분하게 이해가 가도록 설명을 하겠다, 이러한 예) 를 드는 것은 그대들이 이러한 시를 스스로 이해하고 분석하며 평가할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주의ㅡ
그리하여 주목하라- 나는 이러한 시를 통하여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시로부터 다양한 분석과 이해에 몰두하면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과 편견, 고정관념이 희석이 되면서 인식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처럼 시로부터 보다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다양하게 분석하며 인식하는 과정이 있어야 사고가 수렴과 확장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지혜로 전환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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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설명
위의 시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니체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 즉 우울증을 겪는 것을 표현한 시이다, 이처럼 시를 짧게 설명할수도 있다,
그리고 보다 자세히 설명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시를 도구로 보다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시를 보고 더이상 읽을 것이 없는가? 혹은 어디에서 이해가 멈추었다면? 한번 더 천천히 헤아려 보라, 그러면 처음 보던 이해와 달라 질수가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처럼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한발씩 헤아리고 나아가다 보면- 서서히 인식이 지혜로 전환되어 간다, 먼저 시의 제목인 "나그네"를 살펴 보면? 혼자서 방황하며 헤매이는 상태를 말한다, "그의 그림자"란 혼자된 나그네의 슬픔과 외로움이 감정의 무게로 이어진- 즉 감정이 그림자가 되어 무게로 눌리어 꼼짝할수가 없는 상태이다, 그곳까지 이해가 나아갈수 있다면 나그네가 우울증이란 현상을 겪는 것을 간파할수 있다, 그렇게 의도를 헤아리고 집중하다 보면 시를 지혜의 도구로 인식하기가 편하고 이해를 넓히는데 도움이 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해가 되면 니체가 시의 제목으로 사용한 나그네란 의미와 그의 그림자라는 의미도 쉽게 알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한번 더 헤아리고 생각해야 한다는 이유를 느낄 것이다,
참고로
니체는 인문학의 3대 거봉이라고 불린다, 나의 견해로 니체는 인문학의 최고봉이고 판단한다, 사실 우리는 그의 철학보다 시에 주목해야 한다, 니체는 어려서부터 천재라고 불리었고 지식이 출중하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점이다, 니체가 어려서 총명하고 천재였다는 말은 똑똑한 기능 즉 지능( IQ )이 높아서 많은 지식을 알고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아무리 총명하고 똑똑한 천재라고 하여도 단지 지식만 알아서 박학다식할 뿐이다, 지혜의 경지에서 보는 니체는 오직 지식만 알고 지혜를 모르기에 즉 "자신도 모르는 자! 한마디로 정리가 된다, 그는 독일에서 20대 후반에 대학 교수를 지냈다, 하지만 니체의 인식은 완전하고 독립적이며 무한한 가치로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니체의 우울증은 대학 교수일때 온 것이 아니고 이후에 겪은 것이다, 이처럼 우울증은 예외가 없다, 누구라도 자신을 아는 지혜를 모르면 우울증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니체에게 우울증이 왔을때는 가장 괴롭고 견디기 힘든 시기였지만, 이 시를 쓸때는 지혜를 증득하고 최고의 경지에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지나면서 새롭게 인식을 자각해야 비로소 지난 것을 보듬어 주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란 돌아 보는 것조차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거부하지 않던가! 니체가 우울증의 과정을 시로 쓴다는 자체는 그가 우울증을 겪던 시기를 지나서 자신의 경험을 보다 인간적이고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니체에 대하여 오해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으니 주의하자! 니체의 긍정이란 이미지는 좋은 것이 좋다는 긍정이 아니라- 반드시 설득력이 있는 긍정이다,
(39)
제목의 이해 ㅡ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
시의 제목에서 니체는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라는 표현을 하였다, 여기서 니체가 의도한 나그네란 일반적인 나그네이다, 그러나 본래 니체가 알고 있는 나그네의 가치로 분석하고 설명하려면 시간이 모자란다, 지면상 짧게 간추린다,
본래 니체가 인식하는 나그네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름에 달 가듯이 유유자적하는 나그네이거나 삶의 허무를 느끼고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다, 그는 이미 시적 사고관을 지닌 지혜의 경지에 있었기에, 자신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자유하는 즉ㅡ 인간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자를 나그네로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아는 나그네는 보다 현명하고 완전하게 독립적인 가치로 홀로 선 자를 뜻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그네와 니체가 생각하는 나그네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아직 그러한 의도를 나타낸 것은 아니므로 더 읽어가며 헤아려 보기로 한다, 다시 말해서 시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뜻이다, 시는 의심 할수 있는 만큼 모두 하고- 질문은 할수 있는 만큼 많이 하며- 가정은 할수있는 만큼 많이 하는 것이- 자신의 인식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그네에서 "그의 그림자" 라는 표현은 어떠한가? 우리가 아는 지식의 범위에서 생각하면 "그의 그림자" 란 태양이나 달빛에 비치는 나그네의 그림자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이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나그네의 그림자로 생각하는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지식이고 상식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그림자에 대한 어떠한 의도나 정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이해가 멈추면 우리가 인식의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ㅡ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가 시의 제목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ㅡ
따라서 니체가 나그네에서 "그의 그림자"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시적이고 철학적인 가치가 담겨 있다, 니체가 생각하는 나그네에서 "그의 그림자란 생각하는 나그네의 느낌과 어두운 감정을 그림자로 표현 한 것이다, 그가 정신적 부작용인 우울증을 "생각의 그림자"로 선택한 것은 그가 언어ㅡ 즉 말의 가치를 얼마나 정확하게 선택하고 사용하는지 알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자"란 우울증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니체가 언어를 깨우쳐 인간적 가치를 통찰하고 지혜의 경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시의 내용을 이해하고 결론까지 도달하면 나그네의 그림자는 우울증의 막다른 길에서 꼼짝을 못하고 견디고 있는 상태이다, 이 시는 니체의 "우울증이 걸린 사람" 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의 조각으로, 뭉크의 "절규" 라는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위대한 작품이란 위대한 지혜로부터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가 시적 사고관의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면 자신을 모르고 위대한 가치를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세계적인 지성의 길도 알수가 없다, 위대한 지혜를 모르면 세계적인 시와 철학, 예술, 인문학의 어떤 가치와 핵심도 아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것은 시적 사고관에서 창조되고 이해되고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가치와 핵심을 창조하는 선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지혜를 증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의 그것들은 언제나 최고의 상태에서 만들어지고 창조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니체가 이 시를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지만, 세계적 시인들, 철학자, 예술가들은 모두 현재가 압축된 사고를 지닌 초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은 모두 현재형으로 생각하고 행위를 하며 작품을 만든다는 것도 유념하자,
돌아가지도 않겠는가, 올라가지도 않겠는가.
그렇게 넓고 자유로운 길에서 꼼짝도 할수 없는 상태, 생각이 발이 묶인 것이다, 끝없는 무기력과 절망의 고통을 혼자서 견디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게 되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아래로도, 위로도, 내려갈수도, 올라 갈수도 없는 상태에서, 니체는 돌아가지도 않고 올라가지도 않겠는가, 라는 표현으로 묶어 한번에 정리하였다, 우울증-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찾아 오고 무기력한 슬픔과 고통이 지루하게 반복되기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영양이 다니던 길도 없는가,
우리는 높은 산이나 절벽같은 협곡을 마치 들판처럼 자유롭게 달리는 영양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양처럼 언제나 생각하던 길로 습관처럼 다녔지만 지금은 그길이 어디인지 언제 그길을 다녔는지 알수도 없고 기억조차 없다, 생각하는 길이 과거에 지상의 낙원이었지만 지금은 천길같은 낭떠러지가 되어 있다, 세상 어디에도 길이 있지만 생각의 길은 막혀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헤아려 보라- 생각이란 얼마나 자유로우며 무한하고 창조적인지- 도대체 무엇인들 못하고 어디인들 못가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사방의 벽에 막혀 한발짝도 움직 일수가 없는 상태이다- 즉 우울증이 걸린 상태가 되었다, 니체는 그것을 산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영양이 다니던 길도 없는 것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여기에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생각하는 방법이 묶인 것처럼 어떤 생각도 말도 행위도 할수 없는 무기력하고 지루한 고통의 상태를 견디면서 오직 시간이 지나 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ㅡ 아무런 약속도 목적도 기대도 없이 오직 절망의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려야 하는 심정은 결코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그렇게 나는 숨을 죽이며 시간이 지나 가기만 기다리고 있다,,
눈으로 보고 손에 잡히는 것일랑 꽉 붙들고
눈에 보이는 외부에 것을 활용 할수가 있다면? 어떤 것이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할 것인가! 하지만 자신의 생각조차 마음대로 못하니 아무 것도 할수가 없다, 우울증- 그곳에 묶여 있으면 아무런 대책도 못쓰고 당하게 된다, 내 안의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수 없는데,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고 위안을 받으며 구원을 기대 할 것인가! 차라리 물에 뜬 지푸라기라도 잡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잡아 꽉 불들고 단 한발이라도 벗어 날수가 있을텐데,,,
다섯 자 넓이와 아침 노을,
이전에 세상은 언제나 파아란 하늘처럼 무한하고 자유롭게 보였는데 지금은 온통 무거운 고통과 지루함과 지쳐 겨우 다섯자 넓이처럼 작아 보인다, 우울증을 겪는 자신을 다섯자 넓이의 세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으면 아무리 좋은 충고나 위안도 귀에 들어 오지 않게 마련이다, 실로 주의해야 하리라ㅡ 인간의 깊이를 모르고 손을 내미는 얕은 말이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 온다, 이처럼 고통을 겪는데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만한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슬픔과 고통 뿐인데 빚나는 아침 노을이란ㅡ 더욱 가슴을 찢어지게 할 뿐이다, 아침의 노을조차 기꺼이 맞이 할수가 없는 무기력과 자괴감이 자신을 끝없는 고통과 절망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발아래 세계와 인간과 그리고 죽음!
눈에 들어오는 외부의 세계보다- 다루기 힘든 것이 내안의 세계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구속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스스로 다섯자 감옥에 갇히고 만 것이다, 어제는 희망이던 세상이 오늘은 절망의 늪으로 끌고가며 삶의 의지와 자존감을 희석시키니- 겨우 다섯자 넓이의 발 아래 작은 세계란! 감정의 무게가 죽음의 골을 타고 땅으로 내려갈 뿐이다, 자신을 유혹하는 생각이란 온통 발아래 지하의 세계- 더이상 버틸 생각도 의지도 없는 인간이여! 차라리 죽음을!,,,
이정도 설명으로
그대가 이 시를 충분히 이해하고 조금 더 알수가 있다면 처음에 자신이 지식으로 본 것의 이해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자- 이제 그대는 스스로 시의 가치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언제라도 시 읽기에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고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다시 강조하면 한국의 시는 지식인이 시를 쓰기 때문에 내용도 간단하고 철학적 이해도 없으며 무엇보다 지혜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인식의 분별력이 떨어져 언어조차 냉철하게 가려내지 못한다, 따라서 한편의 시를 읽어도 세계시를 추천하는 바이다, 누구라도 항아리 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고 세계적인 작품과 부딛치고 그것과 어울려야 새로운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40)
참고ㅡ
나의 설명을 읽고 시를 보니 어떠한가? 세계시란 아무리 내용이 간단해도 지혜가 담겨 있으며 무한한 가치로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처음에 그대는 이 시를 자신이 아는 지식의 관점에서 보았지만, 시는 지혜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시를 분석하고 헤아릴때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게 분별하고 다양하게 자각하기 위하여 부단하게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시읽기에서 진도는 고려할 필요가 없고 보다 중요하지도 않다, 누구라도 시간은 충분하다, 언제라도 한번 더 세밀하고 집요하게 시의 가치와 핵심에 집중하며 이해를 넓히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 시인의 의도에 다가서려고 노력을 해야 그들과 같은 인식으로 사고가 확장되며 위대한 지혜의 경지로 다가 갈수가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란 성질은 이해가 가능하고 무한하게 연결될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 즉 자신의 인식을 확장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우리가 시에서 한번 더-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하고 헤아리는 부단한 인내와 노력이 인식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라고 판단하고 고리타분하게 넘길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더- 그리고 조금 더 헤아리고 분별하는 방법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과 미래를 좌우한다면, 그리하여 조금 더 넓게 깊게 높게 사고를 확장하는 끝에서 무한한 자유와 혁신, 창조를 추구하는 지혜의 경지로 인도하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져야 하지 않은가! 척 보면 알게 되는 지혜란 그렇게 쉽고 가볍게 증득 할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면상 내가 이처럼 길게 설명한 것은 한번의 예)로 족하다,
(41)
( 니체 )
R 바그너 -
사슬에 고통 받는 그대,
평화도 자유도 빼앗긴 정신이여,
언제나 의연하면서 그래도 구속받는 정신이여,
점차 미움을 받아 발가벗겨진 정신이여,
마침내 그대는 향유가 든 독배를 들었다,
아, 그대도 십자가 곁에 쓰러졌다,
그대도 아 그대도--정복을 당하였는가!
오랫동안 나는 이 굿을 보고 섰다,,
전옥과 내음, 비통과 원한과 죽음의 내음 사이로
그 사이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향연과 교회의 내음
그것은 서먹서먹하고 몸서리 처진다,
춤추며 나는 어릿광대의 모자를 하늘에 던진다,
나는 빠져 나왔으니까!
설명
이 시는 니체가 R.바그너를 향하여 쓴 시이다, R 바그너가 우울증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종교를 찾고 신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러한 과정을 겪어서 이미 알고 있다는 의도로 쓴 시이다, 시의 시작 부분에 니체가 R바그너에게 "사슬에 고통받는 그대" 란? R 바그너가 스스로 생각의 사슬을 만들며 자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울증에 고통받는 상태로 해석하면 된다, 중간 부분의 "오랫동안 나는 이 굿을 보고 섰다" 란? 니체도 R바그너처럼 인식의 바닥에서 해매이던 지루한 고통이 오래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가 니체처럼 우울증의 고통과 정신적 압박을 경험하지 않고는 이러한 느낌을 표현하기 조차 어렵다, 오직 우울증을 당해보고야 그것이 절박하고 위험하지 그지없는 정신 상태라는 것을 알고 이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니체가 오랜동안 인내와 노력으로 견디던 우울증을 한으로 표현하고 있고, 그것은 굿처럼 풀어내야 할만큼 심각했다는 반증이다, 니체가 자신을 아는 지혜의 경지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R 바그너에게 벌어지는 그러한 현상을 마치 손바닥 안처럼 꿰뚫어 보고 "오랫동안 나는 이 굿을 보고 섰다"고 표현한 것이다, 시의 끝 부분에서 "나는 빠져 나왔으니까" 라는 표현은? 니체가 우울증에서 해방이 된 것을 의미한다, 누구라도 인간의 의지를 극단적으로 시험하는 우울증에 걸리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참게 되거나, 무기력하게 시간만 가기를 기다리거나, 의지를 포기하고 신을 선택하던가,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니체는 삶에서 겪을수 밖에 없는 우울증을 인간적 경험과 과정의 하나로 받아 들이고, 보다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로 현명하고 지혜롭게 빠져 나온 것을 의미한다, 그는 스스로 인식의 바닥을 딛고서 지혜의 하늘까지 보게 된 것이다,
(42)
니체
가장 고운 육신은----- 베일일 뿐 -
그 속에 수줍어하며....보다 아름다운 것이 감추어져있다,,
설명
인간에게 보다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인 마음에 있다, 우리의 육신이 가장 고우며 아름답다고 하여도 그것은 마음을 싸고 있는 베일일 뿐이다, 사실 이 시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내용을 표현한 것보다 더 깊은 의도가 들어 있다, 누구라도 자신이 알던 지식의 가치에서 지혜의 가치로 바꾸어야 내면에 감추어진 소중하고 아름다운 보물을- 알게 된다는 뜻이 숨겨진 것이다, 즉 니체가 자신처럼 내면을 관조하는 지혜의 눈(마음의 눈)이 있어야 그렇게 볼수 있다고 의도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지혜라는 내 안의 보물을 찾아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니체가 하는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는 말과 의도가 같은 것으로 보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어릴때부터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하고 지식이 출중하여 겨우 20대에 대학교수가 된 이때가 비로소 지혜를 증득하고 지식보다 지혜가 상위개념이란 것을 간파하고 그것은 진리라고 판단한 지점이다, 인간에게 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내면의 지혜로 숨겨져 있는 것을- 니체가 지혜의 경지에 올라 자신의 내면을 확인하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자신에게 잠재하는 위대한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밖인 외부의 환경과 분위기를 찾거나 군중과 대세라는 무리에 휩쓸리지 말라, 또한 막연하게 종교를 찾고 신에게 매달리지 말라ㅡ왜냐하면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ㅡ지혜의 경지로 가는 길은 자신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보물처럼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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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 )
나는 오직-
말을 만드는 사람
말이 전부다,
내가 전부다,
( 설명)
말은 독립적이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기호, 숫자, 고유명사 등,이 있고 가치와 핵심을 보조하고 이미지를 형성하는 형용사,부사, 동사, 등,이 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완전한 단어와 불완전한 이미지로 구성이 되므로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말이란 정서와 가치관을 형성하고 소통하는 도구이기에 무엇보다 의도를 바르게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말이라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살아가는 반면에 스스로 어렵고 불편하며 불완전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줄도 모르고 살아 간다, 세월이 가고 늙어 갈수록 공통된 현상으로 나타나는 우울증과 치매라는 정신적 질환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러한 현상은 말이라는 지식적 습관과 이미지가 고정 관념화 될수록 인식의 틀에 갇히게 유도하니까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각종 부작용과 후유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드는 "인간은 누구나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 고 주장하였고, 아인쉬타인은 "인간의 미래는 마음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가 이들의 의도를 바르게 간파할수 있다면 말이라는 언어와 습관에서 보다 냉철하게 헤아리고 다양하게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각자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을 배워서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를 헤아리고 분별하면서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말로부터 습관된 인식을 다양하게 헤아리고 분별하는 지혜를 체득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지식의 과정 뒤에는 완전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으로 유도하는 지혜의 과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과정이 아니라 필연적인 과정이다, 인간은 지혜를 체득해야 비로소 자신을 완성으로 유도하고 무한한 세계를 추구하며 자유의 영원성을 담보하게 된다, 우리가 자유롭고 완전하며 독립적인 인간이 되려면 반드시 자신이 알고 있는 말의 의미를 헤아리고 인식을 자각하며 새로운 지혜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말이라는 지식적 습관과 추상적 이미지가 지금까지 자신의 정신을 휘둘리게 하였던 사실을 알아 채고 부단하게 노력한 끝에 말이 지배하던 인식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위대한 지혜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니체가 말이란 지식과 이미지를 배우고 알았을때 그것은 자신을 다루었지만 말이 지니는 성질과 습관적 타성을 깨우치고 새로운 지혜로 완성이 되면서 비로소 자유롭고 완전하며 독창적인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니체가 지혜를 증득하고 자신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생각을 다루면서 비로소 말을 다루게 되었다, 그는 시의 전부가 된 것이다,
우리도 위대한 지혜를 체득하여 보자! 가장 좋은 방법은 지혜의 끝에 도달하는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나는 세계시를 약 1년ㅡ시도하는 과정이 있었고 결과를 검증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2년ㅡ 총 3년 정도가 걸렸다, 물론 지혜를 증득하는 기간이 빠르다고 좋을 것도 없지만- 느리다고 현명한 것도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전에 나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현실에 적응하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 함께 가 볼까나?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해탈의 세계ㅡ 시인의 나라이다!
참고ㅡ
내 글은 지혜와 연관이 되어 더러 불교에서 주장하는 해탈과 비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로 인하여 특정 종교인 불교를 폄훼하고 싶지가 않다, 오히려 종교와 비종교를 위한 소통과 보완, 협력과 발전으로 이해가 되길 기대한다, 사실 나는 불교와 가장 인연이 깊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내 초등학교 1학년때 이름은 최재억, 그때 바꾸어 놓은 이름이 "최재왕"이고 내 이름을 바꾸어 준 사람은 스님이다, 길가다 우리집을 들른 스님이 내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때 바꾼 이름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ㅡ뿐만 아니다, 내가 시를 통하여 지혜를 증득하고도 그것을 모르고 지냈는데 종교 tv에서 붓다가 말하는 것을 보고 ㅡ비로소 내가 지혜를 증득한 것을 알았으니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의 글로 불교계가 원망하거나 비하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붓다를 위대한 시인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신도와 비신도와 동등하게 존중한다, 우리는 깨달음의 목표는 같지만 추구하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또 한가지 덛 붙이자면 나는 종교가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대략 60대까지 깨달음을 통하여 지혜의 자신을 알지 못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다, 노년에 이르러서 심심은 쇠약한데 급격하게 무너지는 정신 건강을 어떻게 하겠는가! 오히려 종교라도 찾고 신을 믿고 의지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 단 그렇다 하더라도 종교지도자는 반드시 자신을 아는 지혜를 증득한 자격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나는 무신론과 유신론을 적절하고 현명하게 받아 들일 뿐으로 나에게 쓸데없는 종교적 오해나 착각이 없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 글을 시작한지도 벌써 10년이 되어 간다, 이미 지혜로 다 알고 있어도 지능이 떨어지니 글의 질서가 문제가 된다, 수만번을 고치지만 개의치 않는다, 지혜는 낙수물로 바위를 뚫는 것처럼 인내와 노력이라는 도구를 현명하게 사용한다, 여하튼 직업상 하는 일은 바쁘고, 빌어먹을 정치가 신경이 쓰이니- 그곳에 시간을 뺏기고 있다, 지난 대선 안철수의 대권을 문재인과 패거리가 도둑질 하는 바람에 - 다시금 쓸데없는 시간을 그곳에 낭비하다니!,,,깨달은 자의 업보이다, 과연 내가 사라지기 전에? 이 글이 끝날지 모르겠다, 내 지능이 보통만 되었어도 진작에 끝났을텐데 ,,,그것만 조금 아쉽다.
진행중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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